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0-26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의 중보기도의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하여 나오게 될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들 가룟 유다를 제외하면 11명의 제자들밖에 없었습니다. 그 11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나오게 될 될 열방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제자들)을 이미 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내용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현재는 11명입니다. 그러나 그 11명을 통하여 만민의 비전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까지 포함한 12명의 제자들을 3년간 양육하셨지만 예수님은 12명을 양육하시는 심정으로 양육하신 것이 아니라 만민을 양육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그 12명을 양육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12명을 양육하시면서 만민을 양육하는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제자들을 양육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 충성된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작은 일일지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할 때 장차 큰일을 하게 되더라도 정성을 다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새롭게 읽게 되었습니다.
작은 일을 대할 때 비록 작더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 작은 것 안에 큰 것을 보라는 말씀으로 읽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지만 12명으로 보지 않고 만민을 보셨던 것처럼.
12명을 대할 때 12명을 대하는 심정으로 대하시지 않고 만민을 대하시는 심정으로 제자들을 대하셨듯 우리에게 작은 것들일지라도 그 규모나 숫자로 대하지 말고 작은 일이지만 그 안에 큰 일이 담겨져 있음을, 큰 것을 품고 있다는 비전으로 그 일들을 대하라는 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비유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친 제자가 겨우 12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감사해야지.’
이 정도의 감사가 아닙니다.
12명이었지만 그 12명 안에 만민이 들어있으니까 그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만민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그래도 감사해야 되니까, 이것조차도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것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감사하라는 수준의 감사를 넘어서서 비록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것이지만 사실은 작지 않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작은 것 안에 엄청나게 큰 것을 담아두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겨자씨 한 알 안에 겨자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나무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가지 그리고 그 가지에 붙은 무성한 잎들로 인하여 새들이 와서 그 나무에서 깃들여 쉬지 않습니까? 겨자씨 한 알 안에 큰 나무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겸손한 의미로의 감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큰 것을 비전으로 볼 수 있는 감사여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감사가 더욱 확장되어야 함을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작은 것도 감사합니다. 이것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고 또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보다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에게는 이것이라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정도의 수준의 감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우리의 삶이,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능력이 비록 12명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그 12명 안에 만민을 담아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12개밖에 되지 않으니까 12개라도 잘하겠다고 하는 비전의 감사와 기도를 넘어서서 12개가 곧 만민임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 비전으로 기도하고, 또 그 비전 안에서 감사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주님의 비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통해서 나오게 될 만민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지금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을 했으니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하여 나오게 될 수많은 제자들은 하나가 되기가 어려우니까 그들이 하나가 되어서 그 하나 됨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고백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될까요?
11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대로 주님이 비전 가운데 보신 것처럼 지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대구에 있는 우리 교단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대구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지금 한국교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교단들이 다 하나가 되어 연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습니까?
과연 무엇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대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활절 연합예배 때 대구의 모든 교회들 온 성도들이 대구 스타디움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송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됨을 보여줘야 한다고 교회마다 홍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대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은 그런 하나 됨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하나의 구호를 외치면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친목을 다지면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단합대회를 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좁혀서 생각해 보면 우리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였고 또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될까요?
예배 때마다 다 함께 모임으로 하나가 됩니까?
하나가 되자고 하는 구호를 통하여 하나가 됩니까?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그 목표를 위하여 온 마음을 거기에 쏟을 때 그것으로 하나가 됩니까?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이긴 합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다 같은 마음으로 함께 모여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 되는 모습이긴 합니다.
또 온 성도가 같은 마음과 같은 비전을 품고 교회를 섬기고 사역하는 것 또한 하나됨의 모습이긴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됨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이 땅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본질적으로 우리들에게 기도하신 하나됨이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같이 친목을 다져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단합대회를 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같은 구호 아래 모여서 하나가 되게 해주시고 같은 사업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주시는 것보다는 본질적으로 우리 교회 온 성도가 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교회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설령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하나가 되는 것 아닙니까?
대구에 있는 온 교회와 온 성도들이 서로 흩어져 있고 각기 다른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각기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고 교단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온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다 순종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 하나 됨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예수가 그리스도구나’ ‘예수가 생명이구나’ ‘예수가 오늘 우리의 구원자구나’임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구의 온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대구의 교회들을 무시하면 안 되겠구나.’
모든 관공서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뭔가를 하자고 제안하면 그 말을 잘 들어줘야 겠구나.’
‘선거 앞두고 교회에 잘못 보이면 표가 나 날아가겠구나.’
이렇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의 교회들이 똘똘 뭉치니까 힘이 대단하니 잘 해줘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하여 이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예수가 생명이구나.’
‘예수가 구원자이구나.’
‘예수가 진리구나.’
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을 세상이 알게 해주옵소서”
이것이 곧 하나됨의 목적입니다.
하나됨 그 연합과 일치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증거하고 세상에 드러내므로 세상이 그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온 교회와 성도들이 주신 진리의 말씀에 다 순종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고 그 말씀의 길로 걸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하여 함께 모이고 또 함께 마음을 다하여 사업도 하고 사역도 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전에 뭐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일치요 진정한 연합이요 진정한 하나됨이 됩니다.
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할 때 의미 있는 진정한 연합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하나됨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일치가 되는 것임을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됨이 쉽지 않다는 것이 뒤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먼저 그 하나됨이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절)
교회의 영광은 하나됨입니다.
하나가 될 때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말씀에 모든 교회와 성도가 순종할 때 그것이 교회의 영광인 것입니다.
다른 것이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사탄의 거짓말과 유혹에 속으면 안 됩니다.
높은 건물도 아름다운 건물도 웅장한 건물도 대규모의 기독교인도 교회의 영광은 아닙니다.
진짜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가 되는 게 영광입니다.
무엇이 영광입니까?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영광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100%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고백하며 주신 말씀을 그들의 삶으로 가져와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 됩니다.
하나됨이 영광입니다.
우리는 영광이라고 하면 굉장히 찬란하고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씀하실 때 영광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수난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셨다고 하는 구절의 단어를 바꿔서 표현하면, 요한복음 전체의 영광에 대한 이해 안에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제자들에게 수난을 줬다.”
어떤 수난입니까?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이 제자들에게 수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죽음에 대하여 요한이 기록할 때마다 거의 언급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곧 주님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수난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그것이 수난인데 그것이 영적 차원에서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하게 진리 안에서 파악하고 깨닫지 못하면 영광에 대하여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만왕의 왕으로서 천군천사를 대동하시고 이 땅에 호령하시며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임재하시고 찾아오시므로 영광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것이 그분의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그 이름이 자기를 버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발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 것이 주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그의 상속자이면 그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지니라”
그렇다면 진실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주님과 함께 받을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말씀, 진리이신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영광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다른 것들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통하여 그것이 진리 안에서 우리에게 영광이 될 때 그 밖에 우리의 삶의 외형적인 많은 것들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삶에 복종하는 것이 없이 얻어진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가지고 있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꼭 그들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적용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얻은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길과 반대의 길로 가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진리를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원하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또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진리 안에서 보면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 세상이 자랑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리에 복종하고 순종함을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영광이 됩니다.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영광은 진리이신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온 교회와 온 성도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찬송하며 외쳤던 그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찾아옵니까?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종려주일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의 삶에 작은 것을 통하여 큰 것을, 적은 것을 통하여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작지만 큰 것을 대하는 감사하는 태도로 적지만 많은 것을 대하는 기쁨의 태도로 우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기쁨이 되는 존귀한 삶이 우리 가운데 더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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