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한복음 18:12-27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말씀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내용으로만 보지 않고, 요한복음이 기록된 1세기 후반에 시대적인 상황 아래에서 베드로의 부인을 좀더 보고 싶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1세기 후반과 1세기 말에 당시 초대교회는 굉장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당시 이 박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배교를 하게 되었고 이 배교의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단 요한은 베드로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나쁘다. 어떻게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할 수 있냐?”
이렇게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게 된 그 원인을 제공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도 요한이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당시 안나스 대제사장 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의 종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서 베드로가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 가문과 사도 요한 가문이 친척이라고 하는 추론입니다.
또 하나는 사도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종을 거느리던 어부였습니다. 즉 상당한 규모의 어업을 하던 사업가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잡은 고기를 예루살렘에 팔아야 하는데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의 상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루살렘의 상권을 쥐고 있던 대제사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잡은 많은 고기들을 예루살렘에 유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업상의 관계 때문에 사도 요한이 오래 전부터 이미 대사장과 긴밀하게 알고 있었고, 그 집을 들락거리다 보니 그 집의 종과 식구들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사도 요한은 왕래가 있어 이미 안면이 있었기에 안나스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었겠지만 같이 온 베드로가 같이 들어가려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 만일 내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에는 이 말씀에 대하여 기록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같이 따라갔다는 말씀도 없고 사도 요한이 그 집의 종에게 부탁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만 이 정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왜 이것을 말씀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라.’
자기를 과시하려고 썼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를 감추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밝히지 않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때에도 ‘다른 한 제자’ ‘어떤 제자’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로 적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철저하게 숨기는 사람이 제사장 가문과 잘 아는 영향력 있는 막강한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그렇게 기록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공관복음에 쓰지 않았는데 굳이 자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 기록했을까요?
‘만일 그때 내가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베드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부인하지 않았을 텐데. 베드로가 부인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이 마음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굉장히 좋은 의도였습니다.
따라오는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에 그렇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은 베드로의 마음, 예수님이 걱정되는 베드로의 마음,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까 염려하는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그런 베드로를 못 들어가게 놔둘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베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베드로가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하고 도와준 것인데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베드로를 들어가게 했던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배교 상황하고 좀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배교’라고 하면 우리는 다 나쁜 놈이라고 봅니다.
지금도 신사 참배를 무조건 다 싸잡아서 나쁜 역적으로 몰아넣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 일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비단 한국교회 상황만 아니라 배교 당시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교했습니다.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랜 수감기간 동언 모진 고문을 당해서 그들의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도 있었고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해가 끝난 후 믿음을 끝까지 사수해서 수감되고 고난을 당하고 재산을 잃고 몸이 상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 배교했던 사람들도 들어왔습니다.
끝까지 순교의 각오를 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만 교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배교했던 사람들 또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배교했던 사람들도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배교한 사람 그리고 배교하지 않은 사람
더 큰 문제는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 즉 큰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혀 몸이 상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배교한 사람들을 굉장히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배교했다고 하여 다 똑같이 배교한 것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는 지금처럼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믿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 보면 여러 가지 다른 목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당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단단한 각오와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박해가 시작 되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 신변의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들이 많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색출해야 하는 로마 군인들이나 공무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누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까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상 갖다 놓고 거기에 절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절을 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고 또 믿었더라도 종교를 바꿨다고 여기고 증서를 써줬습니다. 그 증서만 가지고 있으면 안전했습니다. 사업도 할 수 있고 장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장도 다닐 수 있고 사회생활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배교가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신앙 양심으로는 도저히 거기에 절할 수 없고 버티자니 생계와 삶이 혹은 가족이, 사업이 큰 위협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담당 공무원들에게 가서 돈을 주고 그 증서를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증서를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증서는 돈으로 샀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우상 앞에 절한 배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절하지 않았는데.’
“돈으로 왜 사냐? 그 정도 자신이 없냐?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어떻게 예수 믿냐?”
이렇게 계속 정죄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그 때부터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교회 안에 지금의 목회자와 같은 감독 가운데에서도 배교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을 버려서 예수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배교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감독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배교를 한 무리들 가운데에서 감독 후보자가 나오기도 하고 박해를 당하여 투옥되었다가 살아서 나온 사람들 가운데에서 감독 후보자로 나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만일 감옥살이를 했던 후보가 감독이 되지 않으면 그들이 뚝 떨어져 나가서 새 교회를 시작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안에서 요한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배교’라고 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그 때 그가 베드로를 들여보내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베드로가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거라고 고백합니다.
괜히 베드로 도와주겠다고 괜히 나서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그 안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미처 생각하지 않고 단지 좋은 마음으로 했던 일인데 결과적으로 나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베드로의 책임도 있지만 그 원인은 내가 그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도록 문을 열어준 건 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숯불’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입니다.
우리 성경은 ‘불’이라고 번역 되었는데 옛날 한글 개혁 성경은 ‘숯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습니다.
불에 대한 이 말씀에 대하여 다른 공관복음의 헬라어 원어는 다 각기 다른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요한은 ‘불’이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 특별한 단어 ‘숯불’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공관복음 저자들은 ‘숯불’이라고 쓰지 않았는데 유독 사도 요한은 굳이 베드로가 쬐고 있는 불을 ‘숯불’이라고 했을까요?
‘숯불’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주 작은 불, 작은 불씨
본문에서 ‘불’이라고 번역한 것은 ‘숯불 더미’라는 뜻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작은 불씨들을 베드로가 쬐고 있었다는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두 가지 의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제자들을 찾아가지 않으십니까? 새벽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정확하게)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서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그 때 그 ‘숯불’입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서 막 주님께 달려와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주님이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 때 그 불이 숯불이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쬐고 있었던 바로 그 ‘숯불’
“너 그 때 숯불에서 생선을 굽고 있을 때 나를 부인했지?”
이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실수했던 그때 그 상황을 주님이 만들면서 용서하시고 거기에 생선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회초리가 아니고 생선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고 품으시는 주님!
그 설정 안에서 굳이 ‘숯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숯불’은 육신의 불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도 요한이 사용했다고 묵상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숯불
우리는 다 좋은 의도로 합니다.
우리는 다 좋은 마음으로 합니다.
교회 일을 할 때, 인생을 살아갈 때 때때로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들이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나쁜 마음을 먹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정말 잘해보려고 좋은 의도로 좋은 마음으로 했는데 결과가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그 불, 그 마음, 그 열정, 그 열심히 육신의 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열정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정서는 모두 ‘숯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불 즉 숯불은, 육신의 열심과 열정은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말씀합니다.
지금 ‘배교’라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말 배교 상황 가운데 사도 요한의 복음서를 읽고 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이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배교한 사람들의 문제는 단지 그들이 육신의 열심과 육신의 열정으로 살았던 결과이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그렇게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그 결과만을 보고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그들을 그렇게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직은 배교하지 않았으나, 정말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배교하지 않은 것인지 나의 육신적인 열심 때문에 배교하지 않은 것인지, 나의 육신적인 열정 때문에 배교하지 않은 것인가?
배교하지 않아 감옥까지 들어갔지만 그들이 그렇게 석방이 된 후 ‘나는 배교하지 않았어’ ‘나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어.’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 신앙을 지켰어’라고 하면서 교회 와서 이것을 주장하고, 그 일들을 자기의 힘으로 과시하여 교회 안에서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면서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했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 일은 육신의 숯불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숯불로도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숯불로도 우리의 열정과 우리 열심으로도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숯불러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불로 했던 것이라면 감옥에서 나온 후 오히려 자신을 숨겨야 하고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박해 때문에 두려워서 배교한 사람들을 덮어줘야 합니다.
“다 그럴 수 있어.”
“내가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이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 숯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다른 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났을 때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요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숯불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열정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열정으로 하는 일은 반드시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저는 베드로의 부인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볼 필요가 있다고 묵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부인이 무조건 잘못이고 나쁘다고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않는 상태에서 즉 우리의 육신의 불로 살아갈 때에 ‘난 아니야’라고 하는 것과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난 아니야’라고 하는 것이 말은 똑같지만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뭐라고 물어봅니까?
“네가 그 사람이지?”
“너 그 사람 맞지?”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답합니까?
“난 그 사람 아니야.”
“나는 그가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난 아니라고 말합니다.
뉘앙스가 참 묘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부인한 것인가?
좀 묘합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데 단지 그 상황에서만 베드로의 부인을 보지 말고 전체적인 신앙의 그림 안에서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난 못해요.”
“난 안 돼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 충만한 자가 못한다고 하는 것, 나는 안 된다고 하는 것,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육신의 불을 가지고 숯불 상태에서 난 안 된다고 하는 것, 난 못한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숯불 상태에서 난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절망의 패배를 가져오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난 안 된다고, 난 못한다고 하는 것은 소망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말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숯불 아래에서 하는 말인가 성령 아래에서 하는 말인가가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절망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다릅니다.
그래서 결국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충만한 후 동일하게 자기를 부인합니다.
“나는 못해요.”
그러나 그 성령 안에서 그는 결국 자기가 숨겨집니다.
비겁하고 두려움 많고 겁 많고 자기만 생각했던 베드로가 갑자기 변합니다.
육신의 베드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상태의 베드로를 부인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사역하기 시작합니다.
즉 똑같이 부인인데 성령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부인의 의미와 부인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그 성령이 폭발하여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순절 추수로 열매가 되었고 그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숯불로도 얼마든지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불은 숯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 우리 안에 더 충만해지고 더 뜨거워지고 성령의 불길이 더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우리의 열심과 각오로도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충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아무리 좋은 의도로 좋은 뜻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숯불이라면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그 숯불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오직 성령의 불로 충만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매 순간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더 충만케 하셔서 하늘의 불로 더 뜨거워지며 우리 안에 성령이 더 불타오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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