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죄가 다르다(요한복음 19:1-16)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죄가 다르다   설교동영상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한복음 19:1-16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말씀 한 절 한 절 깊이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18장 마지막 말씀을 보면 빌라도가 제안을 합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면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면하겠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누구를 놓아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제안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무리들은 빌라도의 제안을 무시하고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에 대하여 다른 사본은 뭐라고 말씀할까요?

바라바의 이름을 이렇게 쓰고 있는 사본이 있습니다.

바라바 예수

그 번역에 의하면 이런 문장이 됩니다.

내가 누구를 놓아줄까? 바라바 예수냐? 그리스도 예수냐?”
두 예수 가운데 한 예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라바를 일컬어 강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 강도라고 번역하게 되면 우리에게 잘 와닿지 않습니다.

바라바를 일컬어 번역한 강도라고 하는 단어는 오늘 우리들의 용어로 번역하면 무장 테러리스트입니다. 바라바가 그런 자입니다.

길 가는 사람 칼 들고 뭔가를 빼앗은 죄인이라거나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흉기 들고 물건 훔쳐가는 수준의 강도가 아니라 무장 테러리스트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로마에 대항하면서 싸우는 무장 테러리스트가 바로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는 그 일을 하다가 붙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런 무장 테러리스트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즉 군중이 원하는 예수는 어떤 예수였습니까?

자신들의 독립을 위하여 로마와 싸워준 예수를 원했던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위해 싸우는 예수와 영혼의 문제를 위해 싸우는 예수 사이에서 죄인은 누구를 선택합니까? 영원의 문제를 예수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를 선택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에도 두 예수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현실을 해결해 주는 예수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

우리가 찾고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의 문제이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시고 싶으셨던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해결해 주시고자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영혼의 문제, 구원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본문은 예수님을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다시 데리고 들어가 채찍질을 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어느 정도 확신했던 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사면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예수를 원하지 않자 다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예수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그것이 맥락상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사형이 확정되기 전에 한 번 채찍질을 당하셨고, 사형이 확정되시고 난 후 두 번째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사형이 확정되기 이전에 채찍질을 당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사형이 확정된 이후에 받으신 채찍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면밀하게 보는 사람들이 시간이 맞지 않는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두 번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본문의 빌라도에게서 받은 채찍질은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 받은 채찍질입니다.

그런데 본래 채찍질은 형이 확정되고 난 후 가해지는 형벌입니다. 형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채찍질을 당하셨으니 그것 또한 불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빌라도는 그렇게 했을까요?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면하고 싶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소한 사람들의 분노, 군중들의 분노가 너무 거세고 너무 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소한 사람들과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싶었습니다. 분노를 가진 사람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예수님을 고소한 유대인들을 만족시기 위해서, 흥분한 무리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여 타협해서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질은 적당한 채찍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로마의 채찍은 채찍 끝에 납이 달려 있거나 예리한 못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채찍으로 맞으면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살이 찢어지는 굉장히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형을 당했던 죄인들 가운데 채찍질을 맞아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죽었던 사형수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30대에 건장한 청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읽혀집니다.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그 연약한 예수님께서, 건강치 못한 체력의 예수님께서 두 차례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형이 확정되기 이전에 한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또 형이 확정된 후에 된 이후에 십자가로 가는 그 길,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굉장히 심한 채찍질을 두 번이나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 채찍질을 받으셨습니까?

그건 분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분노를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분노입니다.

채찍질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형벌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분노인데 그 분노를 예수에게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받게 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채찍질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서 면류관을 씌웁니다.
면류관의 재료가 되었던 가시는 종려나무의 한 종류인데 굉장히 탄성이 강한 나무입니다. 가시나무의 가시는 굉장히 뾰족하고 아주 곧습니다.

왜 가시나무였습니까?

당시 왕들은 빛을 형상하는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만들면 당시 왕들이 썼던 빛을 표현하는 그 면류관과 모양이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가시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을 때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 가운데 신경이 가장 많이 모여 있고 가장 예민한 부분이 머리 아닙니까?
머리에 살점이 파고드는 가시관을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창세기 318절을 보면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범죄의 결과로 받게 될 저주가 바로 땅의 가시덤불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쓰신 그 가시관은 죄로 인하여 오늘 우리가 받아야 될 그 저주입니다.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시관입니다.

그 저주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신음과 몸부림과 통곡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저주를 주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3)
이 때 앞에 간다는 이 단어는 언제 쓰이는가 하면 외국 사신들이 왕을 찾아오거나 자국의 신하들이 왕을 알현할 때 쭉 도열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앞에 도열을 했습니다.

조롱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730절 말씀에 의하면 침을 뱉었고 갈대로 머리를 쳤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519절에 의하면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조롱했습니다.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 말은 왕이여 만수무강 하소서라는 왕 앞에 쓰는 인사말입니다.

군인들로부터 그런 대접과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아야 될 조롱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조롱을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나가서 군중 앞에 세웁니다.

그 때 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가시 면류관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서 머리에 피가 흥건히 흐르고 있는 모습의 예수님입니다.

군인들이 억센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렸으니 예수님의 얼굴은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의 모습을 한 예수 그리스도!

군명들에 의하여 낡은 홍포가 입혀졌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찢어지고 갈라지고 거기에서 피가 흘러나와 온통 피로 물든 낡은 홍포를 입은 예수님이 군주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빌라도의 의도는 이것이었습니다.

형벌을 받은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 너희들의 잘못된 요구로 인하여 이 죄 없는 젊은이가 이와 같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책망하는 의도였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렇게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백성들의 동정심을 유발시켜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

처음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법에는 행악자로 예수를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법에는 예수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하나도 없으니까 너희 법대로 해라!”

우리는 사람을 죽일 법이 없다!”

이렇게 말하더니 빌라도가 다시 데리고 나와서 예수를 사면하려고 하니까 그제야 그들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스스로 칭했기 때문에

행악자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2416절을 근거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유죄로 판결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가서 심문합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

너는 어디로부터냐

이 말은 곧 어디 출신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모르고 질문했을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 사람임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어디 출신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물었을까요?

그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뭐냐라고 질문한 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영적 기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 2729절의 말씀처럼 빌라도의 아내가 악몽을 꿉니다.

예수로 인하여 악몽을 꾸었다.”

그렇게 빌라도에게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아내의 말이 자꾸만 걸렸습니다.

게다가 7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해서 데리고 왔다고 고발한 것도 흘려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혹시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

그 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2: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낮춰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모든 것들을 다 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 누구한테 주기 아까운 것들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예수님께 소유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들이 더 많습니다.

한번 적어보십시오.

내게 좋은 게 많습니까 아니면 나쁜 게 많습니까?

나쁜 걸 훨씬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까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걸 주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데 주님이 다 받으십니다.

채찍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받으십니다.

가시관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를 받으십니다.

침 뱉고 손으로 때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모든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4)
유월절 준비일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니산월 14일 바로 하루 전 13일을 뜻압니다.

이 날부터 유월절을 준비하는 양을 잡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에 어린 양으로 오셨고, 그 유월절 어린 양으로 준비되기 위하여 유월절 전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제육시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에 나와 있는 시간들은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이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시간은 로마인들의 시간 계산법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1세기 말이었고 에베소 교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간법과 똑같은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육시라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시간 계산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시간의 표현이 다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시간으로 새벽 6시에 예수님은 정식 재판을 받아 사형결정이 선고됩니다.

그로부터 3시간 동안 십자가 처형의 준비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의 장소인 골고다로 이동하게 됩니다.
9시까지 그 시간이 걸렸습니다.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9시부터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천지가 어두워졌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오후 3, 십자가에 달리신 지 6시간 만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 6시가 되면 유월절이 시작되니까 서둘러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립니다.

그렇게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게 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
이 말씀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 왕 너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냐?”

빌라도는 예수님을 계속 사면해 주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 채찍과 굴욕을 주더라도 그들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은 빌라도가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풀어주려고 노력했음을 계속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요한이 빌라도를 옹호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죄의 무게는 다 똑같다!”

이것을 말씀하고 싶음이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한 그 사악한 대제사장!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는 말은 제사장들이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 됩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왕은 가이사 외에는 없다고 말합니까?

얼마나 사악한 발언입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발언입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기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완전히 하나님을 떠났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으니까 자기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를 대망했음에도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죄뿐만 아니라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빌라도의 죄도, 아무 것도 모르고 군중들이 옆에서 부추기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동원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바르고 외친 군중들이나 그 죄의 무게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어.”

나는 모르고 따라와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따라서 외친 것뿐이야.”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모두가 다 똑같이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야 하고, 저주를 받아야 하고, 조롱을 받아야 할 인생입니다.

우리는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16절을 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떠넘기려고 하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죄를 떠넘기려고 합니다. 마치 무슨 핑퐁하는 탁구처럼 서로 죄를 떠넘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핵심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왕은 티베리우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처럼 가이사가 왕의 대표 명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흉상들이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 왕이 기분 나쁘다고 왕의 형상에 침을 뱉거나, 거기에 낙서를 하거나, 못 같은 것으로 찍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누군지 색출해낼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했어?”

그것으로 끝납니까?

도대체 어떤 놈이 여기에 짐을 뱉어?”

도대체 어떤 놈이 여기에 낙서를 해?”

여기에 어떤 놈이 왕의 형상을 훼손해? 누구야? 잡아! 잡아내!”

색출합니다.
만약 색출하지 못하면 그 왕은 온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 황제입니다.
누가 감히 로마 황제의 흉상을 모욕한단 말입니까?

흉상을 모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진노하고 그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인간이 모욕합니다.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조롱합니다.

가시관과 홍포를 씌워놓고 비웃습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인 하나님이 그 광경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이 당장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사지를 찢어 놓아도 시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받을 모든 죄의 형벌을 예수에게 다 전가시키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십니다.

누가? 하나님이!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이전의 죄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의 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이전 인간의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십자가 죽음 이후 인간의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이전까지는 율법을 잘못 지켰다는 수준의 무게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 죄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무서운 죄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 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지 않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 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죄!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죄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한 모든 분노, 모든 저주, 모든 형벌, 모든 조롱,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고 더 부르고 더 찾고 더 사모하는 우리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분노를 다 가져가셨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조롱인데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다 조롱당하심으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으심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님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더 주님을 찾으며 더 주님을 의지하며 더 주님을 부르며 더 주께로 가까이 나가는 믿음의 삶이 우리 안에서 더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와 모든 복들을 우리가 잘 누리고 풍성히 누리는 믿음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