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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남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요한복음 19:17-27)

남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 설교동영상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17-27

 

오늘은 성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조금 더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7)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성경은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압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누구의 십자가라는 뜻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십자 형상으로 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십자가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지는 것이지 죄가 없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남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로 가져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사실 자기 십자가가 아니라 남의 십자가 즉 우리들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내 십자가를 예수님이 자기 것으로 가져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17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때이 말씀에서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남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그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입니까? 남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지고 가는 사람이 진짜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제자의 길을 걷고 싶다면 남의 십자가를 너의 십자가로 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꼭 교회 다닌다고 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여 내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이 대단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생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갑니다.

그 십자가를 누가 대신 집니까?

그 십자가를 누구에게 맡깁니까?

어차피 내 십자가는 내가 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 특별히 내 십자가를 내가 더 잘 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여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이 대단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랑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말할 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내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내가 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마땅히 져야 할 내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을 주님의 제자도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병이 들어서 몸이 아프다면 그 아픔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서 힘들어하고 끙끙거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대신 아파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신 아파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통은, 그 십자가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누구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당연히 내가 지어야 하는 내 것입니다.

누가 좀 대신 아파줬으면 좋겠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하늘아래 누구한테인들 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하여 제자의 도를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내가 져야 되는 당연한 것이고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생들이 다들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굳이 예수 믿으니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간다고 말할 것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제자도의 자기 십자가의 정의는 사실은 내게 주어진 남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필요 없는 분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서는 안 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그분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으니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남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지고 가야 될 그 모든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 내 십자가로 지고 가셨습니다.

네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 간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야. 그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사도 요한 시대 즉 1세기 후반에 교회 안에 허황된 소문이 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달린 것인다.”

이러한 왜곡된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과감하게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가는 약간의 과정에 대하여 공관복음과 다르게 생략을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랬습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 돌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달린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생략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을 보면 모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 지고 갔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거기 서 있다가 엉겹결에 로마 군사의 눈에 띄어가지고 끌려 나와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왜 넣었을까요?

구레네 시몬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너희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된다!”

그 십자가는 자기 십자가가 아니라 남의 십자가야.”

남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는 거야.”

 

자기 십자가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 단어 자체로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 십자가는 내 거야.’
이것은 내 일이야.’

이것은 내 몫이야.’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자발적으로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것, 내가 자발적으로 그것을 선택하고 내 것으로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들의 십자가, 내 십자가인데, 내가 져야 되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당신의 것으로 자발적으로 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니까 억지로 마지못해 지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져야 할 자기 십자가, 즉 우리는 남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가져가야 되는데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깊이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남의 십자가는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우리 안의 십자가가 더 체험될수록 우리는 이 세 가지 단계를 밟아서 더 십자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의무의 십자가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이건 마땅히 져야 할 의무입니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부모들이 왜 힘들어하고 고생하면서 살아갑니까? 물론 자기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식들의 삶도 어느 때까지는 대신 지고 갑니다.

이것은 내 십자가가 아니라 자식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부모가 지금 대신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의무입니다.

늙으신 부모님이 그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으니까 자식 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또한 의무입니다.

부부 간에도 져야 될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고 남편은 아내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십자가 감당하자!’

이렇다면 부부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부는 서로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관계입니다.

이런 십자가들은 의무적으로 져야 될 십자가입니다.

두 번째 십자가는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의무의 십자가를 잘 지면, 그래서 십자가 진리 안으로 더 들어가 십자가와 가까워지고, 십자가를 좀 더 분명하게 체험하게 되면 영적으로 진보하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 십자가 짊어져야 돼?’

내가 왜 이 고생해야 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져야 할 세 가지 십자가가 있구나. 그 십자가를 내가 잘 져야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내게 주어진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고생스럽지만, 부모로서 부모의 도리로, 자식으로서 자식의 도리로, 부부로서 부부의 도리로 서로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의 십자가를 져주는 것이 아니라 위해서 그 사람의 십자가를 내가 짊어질 때 결국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진리 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 진보가 있을 때 그 다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책임의 십자가는 의무의 십자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될 것들입니다.
교회 안에 우리가 감당해야 될 것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영적 진보입니다.

영적으로 진보하여 십자가 안으로 더 들어가 그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면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체험하게 되면 교회 안에 우리가 감당해야 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새벽에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를 드리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새벽에 나와서 함께 기도해야 하는데 이것이 내 몫이다라고 여기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이것이 내 책임으로 여기고 지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새벽에 찬양하는 일이 쉽습니까?

목도 풀리지 않은 시간이고 앞에 서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그 찬양단이 있음으로 예배자들은 너무 감사하고 또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서 이른 시간에 찬양으로 섬기려면 전날 밤부터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그런데 이 사역을 자기 십자가로 취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하면 좋은 일이니까 이것을 내 것으로 내 몫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반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5시 반에 나오려면 몇 시부터 일어났을까요? 5시 이전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와야 합니다. 이 일을 내 몫으로 감당하고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이 일은 내 것이다!’

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교회 안에 우리가 짊어져야 될 일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물건이 부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기물들이 고장 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몫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뭔가 필요한 물건들이 보일 때 생각합니다.

내가 해야겠다. 이것은 십자가다.’

그러면서 그것을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떤 기물들이 망가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가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또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보이는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눈에 안 보였다면 그 사람에게 은혜의 기회가 안 간 것이니 상관 없습니다. 눈에 안 보였으니까 은혜의 기회가 그에게 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한테 계속 보입니까?

망가졌네. 저거 고쳐야 되는데.’

내 눈에 보이고 누군가가 이것을 고쳐야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 은혜를, 그 십자가를 내 일로 여기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내 일이구나. 내가 하면 되겠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할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 일입니다. 내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게로 가지고 올 때 그것이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교회 많은 사역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역들이 우리 눈에 띌 때 내가 해야 될 사역으로 가져가는 것이 곧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 할 두 번째 십자가입니다.

영적으로 더욱 진보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이 때 교회는 단순히 대구제일성결교회만 제한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는 계속 넓어져야 합니다.

제일교회에서 더 넓어지면 대구지방회가 우리 교회가 됩니다.

더 넓어지면 성결교단이 우리 교회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더 넓어지면 대구 전체 교회들이 다 우리 교회가 됩니다.

이것이 영적 진보입니다.

그렇게 진보하게 되면 웨슬레가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세계 교회가 다 내 교회가 되는 것이고, 세계교회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진보입니다.

선교지의 선교사들의 문제가 곧 내 문제야. 내가 그것을 감당하겠어.”
이것이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은 영적으로 진보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더 묵상하면 그보다 더 영적으로 진보한 십자가가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제 한계로는 사랑의 십자가가 세 번째 마지막 십자가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을 나의 십자가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나의 십자가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가 바로 이 사랑의 십자가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을 예수님이 짊어지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그 상처가 흉기가 되어서 공격하는 그것들을 예수님이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의무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30살까지 30년 동안 한 가정 안에서 가족으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 같은데,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집안의 장자인 예수님은 어머니를 잘 섬기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들을 성실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책임의 십자가도 짊어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아픔, 문제들을 보실 때마다 나 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많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많은 상처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온 세상이 곧 그분의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만나는 많은 교인들의 모든 아픔과 필요들을 예수님은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셔서 그것들을 다 해결하시고 짊어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짊어지신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나의 것으로 가져가는 십자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왜 짊어져야 됩니까?”

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내가 왜 짊어져야 됩니까?”
그걸 왜 내가 감당해야 됩니까?”

이렇게 묻고 싶습니까?

그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고 십자가의 진리 안으로 더 가까이 가게 되면 그게 보입니다.

내가 저 사람의 죄를 감당해야지.’

이집트의 수도원 인근 마을에 사는 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어디서 뭐를 했기에 임신을 했어? 도대체 아버지가 누구야?”

계속 추궁을 하니까 궁지에 몰린 처녀가 이렇게 대답하고 맙니다.

사실 이 아기의 아버지는 수도사 마카리우스입니다.”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막 난리가 났습니다.

존경받는 마카리우스가 그렇게 음흉한 사람이었어?”

모든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명예가 한순간에 땅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삶이 한순간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도사 마카리우스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마을을 떠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동으로 모았던 돈을 처녀에게 다 갖다가 줍니다.

아기 낳으면 아기 잘 키우세요.”

그리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가져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수도사는 명예와 체면이 무엇보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바로 명예와 체면입니다.

주변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억만금을 줘도 체면과 명예와 자존심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수도사입니다. 그게 없다면 힘들게 수도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수도사는 세상의 어떤 보배보다 자신의 명예가 너무너무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이 수도사입니다.

그런데 자기 잘못으로 명예를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도 하지 않은 처자가 임신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죄인데 이 죄를 수도사한테 다 떠넘기다니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정말 나쁩니다.

수도사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도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동네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인데 왜 내가 뒤집어 써야 돼?”
내가 왜 그 사람의 문제를 감당해야 돼?”

항변합니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왜 갈등합니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상처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습니다.

왜 당신 상처 때문에 내가 고난을 당해야 돼?”

왜 당신 상처 때문에 내가 힘들어해야 돼?”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억울한 일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변합니다.

왜 당신이 받은 상처를 나한테 와서 풉니까?”

그런데 십자가를 더 묵상하면 그것이 바로 내 십자가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도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내 것을 가져가셨습니다.

주님이 내 상처를 다 가져가셨습니다.

주님이 못 박히시고, 가시 면류관 쓰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내 상처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가져가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안으로 더 진보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 저 사람의 상처도 내가 짊어져야지.’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내가 짊어지는 것.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하여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보입니다.

 

이처럼 남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가져가는 사람만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9)
유대인의 왕!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왕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의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왕이 되셨습니까?

그분이 군림하시고 호령하시고 주장하셔서 왕이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다 왕노릇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게 힘이 있고 큰소리 치고 목소리 높이고 내 주장하고 내 고집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내 의지대로 하고 내 뜻이 관철되면 그것이 내가 왕노릇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그렇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십자가를 짊어진 자가 진짜 왕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자가 진짜 왕 노릇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은 남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레네 시몬이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십자가는 남의 것입니다. 저 사람 것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월절 지내려고 아프리카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괜히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십자가인지를.

그것이 구레네 시몬 인생의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얼마 후에 깨닫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최고의 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됩니까?

십자가를 경험하고 나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십자가를 지고 있기도 하고,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 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더 경험하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 그 진리 안에 서 있게 되면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영광이 될 수 있는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십자가가 본래 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남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가져온 자기 십자가임을 말씀을 통하여 묵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성도와 지체들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나의 것으로 가져갈 수 있는 믿음으로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교회가 십자가를 드러내며 십자가를 나타내며 십자가를 간증하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