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한복음 7:25-36
예수님 드러내놓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말합니다.
“당국자들이 잡으려고 수배 명령 떨어진 그 사람인가 바로 저 사람인가봐.”
“그런데 저렇게 드러나게 대놓고 다니는데 왜 못 잡아? 못 잡는 거야 아니면 안 잡는 거야?”
“왜 안 잡아? 그럼 당국자들도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 줄 알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저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집안사람인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 저 사람이 그리스도일 리가 없어.”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보통 사람들은 특별한 것만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것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나에게 복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오늘도 힘든 하루 살아야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이렇게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복입니다.’
‘내가 밥을 입에 넣어서 먹을 수 있는 것, 꼭꼭 씹어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것, 걸어서 길을 다닐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일상을 특별한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감사합니까?
“하나님 제가 이렇게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음식을 꼭꼭 잘 씹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혼자 힘으로 스스로 안고 일어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특별한 일, 남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는 좋은 일, 남들에게 잘 일어나지 않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어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하나님이 내게 그런 좋은 일을 허락해 주시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들은 그지 않게 여깁니다. 일상적인 것들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들만 감사를 고백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내게 없으면 불평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는 것들이라면 그게 없을 때 불평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매일 마시는 물은 보통 당연하게 여깁니다. 물이 중요하지 않으니 가치 있지 않게 여기고 특별하지 않으니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찮으니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것이 없는데 왜 불평합니까?
하찮아서 고마워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없으면 불평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 내가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먹여줘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내 손으로 밥을 먹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특별한 일이었는지, 그 일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감사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앉고 일어설 수 있는 것, 내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감사라는 것을 언제 깨닫게 됩니까?
몸이 약해져서 근육도 줄고 힘도 없어져서 혼자 걷는 것이 어렵고, 뼈도 약해져서 잘 부러질 때 깨닫게 됩니다.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있어야 되고, 아무리 치료해도 예전처럼 완전하게 회복되지도 않고 워커를 의지하든 휠체어를 의지하든 지팡이를 의지하든 다른 사람을 의지하든 뭔가를 의지해서만 걸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음을 조금 깨닫습니다.
본문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예수가 누군지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출신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다 아는데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하고 전혀 다르지 않고 특별하지 않고 여겼습니다. 사는 것도, 출생도, 집안도 전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의 영적 수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감사를 영적 수준의 척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는 단순히 고맙다는 뜻을 표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은 단지 모든 것을 고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수준의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범사가 그리스도로부터 왔음을 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 삶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깨닫는 수준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통하여 어디까지 깨닫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말씀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면 영적으로 어두운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시겠구나.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아들도 나에게 선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분에게 무엇을 구한들 나에게 아깝겠는가? 다 주시겠지.’
이렇게 말씀을 이해한다면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음이 더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선물이구나. 아들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모두 내게는 선물이구나.’
여기까지 이른다면 더 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워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일상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특별한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고, 오늘 내가 받은 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끝까지 사람들을 이해시키려고 그들의 수준과 그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하지 않으셨을까?
왜 예수님은 그냥 어렵게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33, 34절)
그런데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뭐라고 말합니까?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5절)
예수님은 33절과 34절에서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는 예수님을 찾아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아도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쉽게 말씀하시면 되었던 것 아닙니까?
“사실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물론 그 말씀도 어렵지만 평이하게 설명해 주셨다면 어떠셨을까?
제자들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뒤늦게 알고 그냥 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도 그냥 풀어서 괄호 쳐서 쓰면 되지 않습니까? 정말 어려운 것들은 다른 말씀처럼 괄호 쳐서 설명하면 됩니다.
특별히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이방인들이, 헬라인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 유대의 전통과 문화를 잘 모르니까 그들을 위해서 유대의 전통과 문화를 설명해 주는 형식으로 괄호를 쳐서 설명합니다.
“사실은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40일 있다가 다시 내가 왔던 하늘로 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늘로 가면 너희들이 다시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하는 이 말, 내가 하늘로 간다는 것이 지금 깨달아지지 못하겠지만 그 때에 가면 너희들이 깨닫겠지만 그 때에는 너희들이 나에게 올 수 없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될 터인데 굳이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삶은 사실 다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다 안다고 하더라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때가 되어야 영적인 이해와 깨달음이 가능해집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아야 되고, 다 이해해야 되고, 그렇게 이해해서 다 용납해야 되는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받아들일 수 없어 답답합니까?
화 나는 삶을 살아갑니까?
“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해서 못 살겠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일이 왜 나한테 일어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만일 다 알아야 된다면 주님이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다 깨달으려고 하는 것, 내가 다 알아내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내 욕심은 아닌가 싶습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저 또한 성도들에게 성경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려고 애쓰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선언하면 되는 것이고 아닌가 하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짧은 목회 경력이지만 처음에는 최대한 모두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런다고 해서 성도들이 다 알아듣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설명을 잘하고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못 알아들을 사람들은 아무리 잘 설명해드려도 못 알아듣습니다. 처음에는 못 깨닫는 분들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불쌍한 마음이 더 큽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허락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수없이 많이 들어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은 진리 안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는 말씀의 의미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왜곡하거나 그 복음의 의미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생명의 진리를 교훈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전해야지 어떻게 교훈으로 바꿔서 전달합니까?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말씀을 교훈으로 바꾸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상한 얘기한다, 못 알아듣는 말을 한다,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에게 제 설교가 좀 더 수용되기 위해서 그들의 수준에 맞추는 것 아닙니까?
이해하고 깨닫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들에게 내가 용납되기 위해서 말씀을 평이하게 가르치는 것은 다른 영역인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범위 안에서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수준에서 말씀을 전하면 되는구나. 교인들을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설명하는 데 신경 쓰다 보면 자칫 말씀을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어렵더라도 이 말씀이 생명임을 믿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영의 말씀입니다.
영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영이 살아있으면 반드시 깨닫습니다.
그런데 영이 약하면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고 뿐만 아니라 그 영이 강해야 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깨닫는 말씀이 있고, 그 성령이 내 안에서 강해져야 깨닫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깨닫고, 어떤 말씀은 영이 약하면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영이 강해지면 그 말씀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교훈이고 지식이고 국어고 수학이고 영어라면 열심히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강사가 와도 설명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영원히 그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강해지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 영이 강해지면 내 삶의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분 앞에 가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현재 내 삶의 상황 환경들을 다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하기보다는, 다 알려고 하기 보다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지식을 선택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
35절 말씀을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간다고 하시니까 지금 이 유대 땅에서 사람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고 자기 말을 받아들지 않으니까 다른 데, 헬라 지역으로 가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왜 헬라지역입니까?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한테 가는 거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은 도무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헬라 지역에 사는 디아스포라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거기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헬라 사람들한테 가르치려고 하는가보다 하면서 조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조롱하면서 비웃습니다.
“뭔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영이 약하거나 없어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33절 참조)
우리의 모든 삶이 너무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이것이 복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의 모든 일상이 사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임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지식으로 있지 않습니까?
이 지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순종입니다.
‘내가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 것,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 숨을 쉴 수 있는 것, 내가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사실은 특별한 복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지식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으니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릅니다.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6절)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쓰고 있는 요한은 압니다.
요한 시대에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압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압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더 강하게 하시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영적인 깊이가 약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님만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그 사람이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사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 안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본인도 불편하고 힘들 텐데.’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서 체험해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알게 되니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게 관계 아닙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잘 몰라서 우리 가족들이 하는 행동이 이상해 보이고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가족들은 서로 다 이해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다 이해하니까 품어줄 수 있습니다. 같은 삶을 겪었으니까 다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고 약하니까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안에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능력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능력은 나를 바꿉니다.
내 생각을 바꾸고 내 태도를 바꾸고 내 삶을 바꿉니다. 그래서 능력입니다.
아무리 성경 박사를 찾아가서 성경을 배우더라도 그 지식이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잘 아는 박사를 만난 것이지 예수를 만난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 이 말씀이 우리 삶 안에서 능력이 되어 역사하고 우리를 바꿉니다.
어떻게 바꿉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잘 아는 신부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마치 옛날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낯섭니다.
내 신랑이라고 하는데 너무 낯섭니다.
신랑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그런 분이 나한테 신랑이라고 하면서 오신다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더 체험하기를, 더 경험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안다고 할 때 그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 인생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를 내 인생 안으로 더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안 열어줍니다.
내 인생 안에 문이 여러 개 있는데 문을 하나하나 열어줄 때 그 사람이 내 안으로 더 들어와서 나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저 밖에 있는 대문도 안 열어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문까지는 열어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현관문까지 열어줍니다.
왜 이렇게 사람에 따라 문을 열어줍니까?
그렇게 문을 더 열수록 더 나를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간다는 의미는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더 체험하기 위해 그분의 문을 열고 더 들어가면서 그분을 더 체험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더 들어오시고자 할 때 우리도 우리 문을 더 열어서 그분이 우리 안에 더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문만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관문은 열어놓고 안방에는 들어오지 말고 거실에만 계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거기까지만 체험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체험하기를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시고 또 주님이 내 안에 더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어놓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더 알면 알수록 말씀이 더 깨달아지고 우리의 삶이 더 이해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복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이해 못할 일들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그때 다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말씀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것이 겸비한 마음이고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주님 만날 때에는 다 알려주시겠죠? 그때는 제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겠죠? 이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오늘도 더 그리스도를 안으로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더 영접하는 복된 하루이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은 몰라도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되면, 그리스도를 더 경험하게 되면, 그때 깨닫게 되고 그때 알게 될 것을 믿고 더 그리스도를 체험하길 원합니다. 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길 원하오니 나를 당신 안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오늘 우리 안으로 더 들어오셔서 내 삶의 모든 저 깊은 곳까지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의 온 삶에 주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셔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오늘 더 정결하고 순결하게 조성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인 줄 알고 오늘도 기뻐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lovanote.naver.com
'성경말씀 > 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개해도 생명력은 떨어진다(요한복음 7:53-8:11) (2) | 2025.03.13 |
---|---|
지성은 말로 경건은 행동으로(요한복음 7:37-52) (2) | 2025.03.13 |
유물보다 역사가 중요하다(요한복음 7:14-24) (0) | 2025.03.13 |
재주로 살지 말고 실력으로 살라(요한복음 7:1-13) (0) | 2025.03.13 |
십자가 안으로 넘어져라(요한복음 6:60-71) (0) | 2025.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