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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회개해도 생명력은 떨어진다(요한복음 7:53-8:11)

회개해도 생명력은 떨어진다 설교동영상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53-8:11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결할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보낸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께 빠져서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저주할 때 니고데모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1)

무작정 심판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보고 심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행동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하나씩 하나씩 비교합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까?

운동하러 가신 게 아니라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의 기도처 가운데 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 가셨다는 것은 기도하러 가셨다는 뜻이고, 바리새인들이 자기 집으로 갔다는 것은 그들은 욕망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집중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욕망을 위해 사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말하는 것도,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갔다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에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았던 분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생명의 말이고, 우리에게 드러날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렇게 감람산에 가신 주님은 아마도 밤새 기도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밤새 기도하신 후 새벽 일찍 성전에 가십니다.

그 성전에 가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우연히 음행 중에 있는 여자를 발견해서 그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여자가 음행하는 여자인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그 여자가 음행하는 것을 발각하여 혼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잠복하고 기다렸다가 여자가 음행할 때 현장을 덮쳐서 그 여자를 끌고 온 것입니다.

이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저 여인이 죄를 짓든 말든 자신들과 무관하니 방관했었습니다.

그렇게 상관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 문제에 대해서 진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든 말든 이 사회가 범죄하든 말든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방관자로 지내는 사실상 침묵으로 동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그제야 마치 자기가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마치 그 죄에 대하여 심각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 것처럼 나섰던 것입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에 대하여 별로 관심도 없고 진지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목적을 위해서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여러분 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좋은 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나쁜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도 이렇게 읽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별 말씀 없이 그냥 용서해 주셨어.”

꾸짖지도 않으시고, 혼내지도 않으시고, 벌주지도 않으시고 그냥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내셨어.”

이렇게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때 나타나는 죄가 어떤 것인지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단은 이용할 때가 되면 그 죄를 이용합니다.
이 여인은 그동안 계속 음행하고 있었지만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들키지 않으니까 괜찮은 줄 알고 계속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괜찮았던 것이 아니라 사단이 이 여인의 죄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단은 내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당장 그 잘못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벌도 받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으면 계속 그 죄 가운데 머물려고 하는 죄에 대한 안심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만일 죄 짓자마자 바로 발각되고 벌 받는다면 누가 쉽게 죄를 짓겠습니까?

그런데 그 죄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계속 우리는 그 죄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때가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용합니다.
이 여인의 죄도 이용하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음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여인의 죄를 이용합니다.
이처럼 때가 되면 사단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내 죄를 이용할 것이니 자신의 죄를 그렇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당장 그 죄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 죄 가운데 머무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빨리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별 문제가 없게 된다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죄가 일단 들어오면 우리의 생명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면 분명히 용서해주시지만 영적인 생명력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의 영을 공격하고 혼을 공격하고 육체를 공격합니다.

제일 먼저 영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의 영역을 잘 모릅니다.

바로 육체를 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가보다

마음의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면 바로 깨닫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가보다.’

그런데 영은 잘 모릅니다.

자신의 영의 상태를 예민하게 아십니까?

마치 피부에 가시가 찔리면 따끔한 것처럼 그렇게 예민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그 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모릅니다.

육체가 내 생명인 줄 알고 내 힘인 줄 압니다.

내 마음이나 심리나 정신 같은 것이 삶의 힘인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힘의 근원은 영입니다.

영에서 모든 힘의 근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굉장히 죄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일단 죄를 지으면 우리의 영의 생명력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점점 생명력이 떨어지면서 마음과 육체에 계속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잘 감지하지 못하는데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되면 우리는 생명력이 점점 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 계속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경건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알맹이 하나도 없이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죄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력을 떨어뜨리고 약화시킨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 가운데 계속 들어와 있으면 도무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힘입니다.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령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할 겁니까?”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할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법을 다시 한 번 어기는 행동을 할 것이고 그것을 거기 나온 사람들이 다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 여자를 심판하려고 사람들이 다 준비하고 모였는데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과 다른 판단을 내리면 예수도 문제가 되는 거니까 그 함정을 만들어놓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땅바닥에 뭔가를 쓰십니다.

뭐라고 쓰셨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했다면 아마 기록에 남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재촉하면서 묻습니다.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라.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

계속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다시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또 쓰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돌을 내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다 빠져나갑니다.

결국 예수님과 이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다 어디 갔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죄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첫 번째 죄의 범위는 가장 좁은 범위입니다.

좁게 이야기하면 이 여자처럼 간음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돌로 치라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 이 를 어떻게 보느냐에 우리의 시선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간음한 적이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 여인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간음한 적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나도 그랬는데 내가 무슨 말 하겠어.’

그런데 일단 우리는 이 여인처럼 간음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여인을 판단합니다.

이 상황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좁은 이해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범죄한 것을 보면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두 번째 죄의 범위를 좀 더 넓혀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 없는 자에서 죄의 범위를 좀 더 넓히면 간음한 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그거 뿐입니까?

또 다른 계명들이 많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잘 지켰을지 몰라도 다른 계명은 어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와 같은 다른 항목들은 어길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간음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죄는 지었잖아. 하나도 죄를 짓지 않이 있다면 돌로 쳐라!”

이렇게 죄의 범위를 좀 더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자기들이 간음은 하지 않았지만 죄의 내용이 다를 뿐이지 나 또한 저 여연과 같은 범죄자인데 내가 무슨 판단과 시비를 하겠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 지은 거 없이 잘 살았는데.’

스스로 생각해 봐도 성실하게 죄 짓지 않고, 율법 하나도 어기지 않고, 그렇게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잘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범위를 좀더 확장시켜 보겠습니다.

여기서 그 안에 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죄는 실체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못해서 죄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실체, 하나의 어떤 능력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살아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의 나무라는 뜻입니다.

죄인이라는 뜻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죄 나무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그 해에 병이 들어서 사과를 하나도 못 열매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입니까 아니면 배나무입니까? 사과나무입니다. 사과가 안 열려도 사과나무입니다. 사과가 안 열렸다고 사과나무가 다른 나무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의 나무입니다. 그러니 죄가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죄는 어떤 조건이 만들어져야 나옵니다.

도둑질은 가난이라고 하는 조건, 배고픔이라는 조건이 조성되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가난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을 잘 만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먹고 싶은 것 다 먹었고 배가 고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이 항상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가서 빵 훔칠 일이 있습니까? 빵 훔칠 만한 조건이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빵을 훔치는 죄의 열매가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가난한 부모를 만났거나 어릴 때부터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면, 그래서 항상 배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살기 위해서 남들 것 뺏어 먹어야 되고 더 빨리 먹어야 되고 더 많이 먹어야 됩니다. 없으면 어디 가서 몰래 가져와서 먹어야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다 똑같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이라고 하는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하지 않은 것일 뿐이지 만일 저 여인과 같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나도 간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게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이 중에 죄 나무가 아닌 사람이 있으면 다 나와!”

그러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바라보는 인식이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간음하지 않았으니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갑니다.

이 사람들은 가면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양심이 찔리니까 다 갑니다.

그 앞에서 엎드려서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냥 다 가버립니다.

이 사람들의 자기가 본질적으로 죄의 나무라고 하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도 내가 이 여인이 아닙니까?

본문의 간음한 여인이 내가 될 때, 나를 여인으로 읽을 때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간음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죄는 지었지.’

이렇게 생각하면 이 말씀을 읽고 그냥 떠납니다.

나도 역시 죄의 나무구나.’

어떤 상황이나 어떤 조건이 맞춰지면 나도 역시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죄를 열매로 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구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이 죄를 해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 갔습니다.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이 여인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예수님이 계속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중풍병자에서도 죄 용서해 주시고 죄가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으셨지만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성전에서 만나셨을 때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또한 맥락 안에서 주님이 용서해 주신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죄를 용서해 주십니까?

하나님이시니까 죄를 용서해주십니까?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봐야 됩니다.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은 6개월 뒤의 일입니다.

아직 6개월이란 시간이 남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마주 대하는 그 순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영원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택한 백성들의 죄 때문에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이미 가지고 와서 이 여인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회개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왜 용서해 주십니까?

어떻게 용서해 주십니까?

자식이 밖에 나가서 잘못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이 붙잡혔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에요. 잘못 본 거예요.”
절대 우리 애 그런 애 아니에요.”

원래 우리 아이는 이런 아이가 아닌데 친구들 잘못 만나서 꼬임에 넘어가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는 자식에게 괜찮다고 하고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정말 죄가 없게 하려면, 문제가 없게 만들려면, 잘못한 것 인정하고 잘못한 것을 부모가 그대로 갚아줘야 합니다. 그게 맞지 않습니까?

자녀가 잘못했는데 부모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은 자기 자식이니까 사랑해서 괜찮다고 하시고 용서해서 품어주신 게 아니라, 나를 받아주고 나를 용서해 주고 내게 죄가 없다고 하시기 위해서 부모님이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식들은 쉽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냥 쉽게 죄를 용서해 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 의미 없는 회개를 합니다.
내 죄를 위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죄가 없는 분이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명백한 십자가의 진리가 내 안에서 선명하다면 그렇게 쉽게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 지었으면 회개하면 되지.’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정말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쉽게 죄짓고 가볍게 회개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 몸 자체가 DNA를 가지고 있어서 범죄할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고 속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명백한 이 복음의 진리가 우리 안의 실제라면 우리는 그렇게 죄에 대해서 가볍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이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사람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말씀을 잘하셨습니까?

논리가 굉장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이 여인은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서 엄청난 위기를 모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 잘하는 사람이 나를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혼내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으니 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여인은 또 음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6개월 뒷면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알게 됩니다.

여자가 정말 깨달은 자였다면 나를 용서해 주셨던 그때 그 분이 사실은 메시아였구나. 하나님이셨구나.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구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었구나. 말로 용서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으로 내 죄가 용서되었구나.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여인은 음행에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죄를 이기는 것, 죄에서 떠나는 것, 범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각오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깨닫고, 그 주님을 만날 때 우리 안에 죄를 이기고 죄에서 승리하는 거룩하고 정결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너무 인자하시고 너무 자비로우셔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겨서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여인에게 던지려고 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을 자신에게 던지신 분입니다. 그게 다른 것입니다.

행동이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게 하려고 매복하고 있다가 범죄 현장에서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 형벌을 주님이 대신 짊어주셨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이지 그분이 하나님이라서 용서하신 것은 아님을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나도 이 여인과 같이 죄의 나무입니다. 언제든지 조건이 맞으면 죄를 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이 죄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나의 모든 죄를 종결하시고 나의 모든 형벌을 주님께서 다 받으셔서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신 그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더 만날 때 우리는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가 죄를 이길 때 우리 안의 생명력은 계속 강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계속 죄가 있다면 모든 경건은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계속 약해집니다.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십시오.

그 십자가의 도를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겨서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통해 우리 안에 공급되는 모든 생명들이 다 우리 안에 생명력으로 역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 그러나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형벌을 대신 짊어지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죄가 없으나 죄인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속죄의 은혜를 우리가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우리가 죄에서 떠나며 죄를 이기며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과 그 정결하심으로 채워가는 삶이 되어 우리 안에 생명력이 더 강해지게 하시고 더 큰 생명력으로 넉넉히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