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7:37-52
37절은 ‘명절 끝날 곧 큰 날’ 이라고 시작합니다. 이 때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7일간의 초막절 절기가 끝나고 8일째 성회로 모이는 날을 명절 끝날 큰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제8일입니다. 초막절 7일이 끝나고 제8일에 성회로 모였다고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막절은 한 해의 추수를 모두 끝내고 그것을 창고에 저장하는 때이기 때문에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들은 초막절(장막절) 기간 동안 광야에서 7일간 초막 그러니까 풀잎으로 막을 지어서 거처로 삼아 거기에서 지냈습니다. 초막, 즉 나뭇잎 같은 것들을 꺾어서 조그마한 거처를 만들어서 일주일간 지낸다고 해서 초막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광야 생활했던 것을 의미하며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던 것입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7일 동안 매일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퍼서 성전에 붓는 행사를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270년 정도 계속 지속되었던 초막절 절기의 이벤트였습니다. BC 200년부터 성전이 무너졌던 AD 70년 가까이 초막절에 이 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추수를 다 마친 후 1년 먹을 곡식을 다 거두어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후 지키는 절기입니다. 지금으로 일종의 추수감사주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한 해 농사 잘 지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해 농사 잘 지으려면 때에 따라 하나님이 비를 잘 내려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9월 혹은 10월에 이른 비를, 3월 혹은 4월에 내리는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정확하게 적당한 내려주셔서 우리가 농사를 잘 지어서 추수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으로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퍼서 아침 제사를 드릴 때 물을 부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새벽에 한 명의 제사장이 한 행렬들을 이끌고 성전에서 나와서 실로암 못까지 갑니다.
그 모습을 온 백성이 봅니다.
일종의 이벤트였기 때문에 보고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였기 때문에 초막절에 전 세계에서 온 유대인 남자들은 그 모습을 다 봤습니다. 일종의 페스티벌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황금 주전자를 든 제사장 행렬이 실로암 못에 가서 그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다시 돌아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매일 상번제가 드려집니다.
아침 제사가 드려질 때 서편 굴뚝에 실로암에서 떠온 물을 확 붓습니다.
그 때 성전 찬양대가 “할렐루야” 하고 웅장하고 장엄하게 찬송합니다.
이 모습은 온 백성이 다 봅니다.
굉장히 이벤트 같은 페스티벌인지라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징과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런데 7일까지만 하고 8일째는 그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8일째, 물을 떠다가 성전에 붓는 이벤트가 없는 8일째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정확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갑자기 뜬금없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들이 초막절마다 7일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신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추수하여 큰 풍년을 얻게 되었다며 감사하고 물을 부었는데 그 물, 그 생수가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나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시는 풍성하신 추수가 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표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 배에서, 이 때 그 배는 인간의 욕망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욕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고, 자랑하게 하고, 갖고 싶어 하고, 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욕망의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그런 욕망들에 굶주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갖고 싶은 것들을 다 채우기 위해서, 되고 싶은 것들이 더 되고 싶어서 계속 배고픈 자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습니다.
진실로 만족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은 맛있는 것을 좀 먹어야겠다. 뭐 먹을까?’
그리고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을 당시에는 충분히 배부르게 잘 먹어서 만족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반나절만 지나면 또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찾습니다.
그렇게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겠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것을 찾습니다.
욕망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 그렇습니다.
잠시는 기뻐하고 만족하고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또 더 좋은 것을 찾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집이 없어. 충분합니다. 평생 여기서 살아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몇 달 살다 보면 더 큰 집을 찾습니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을 찾습니다.
우리의 배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계속 생수의 강이 넘쳐난다고 말씀합니다.
그 배에서 계속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그 생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생수가 계속 흘러나와서 더 이상 배고프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채워지고, 그 욕망이 충분하고, 심지어 그 욕망이 넘쳐서 흘러나올 정도로 완전한 만족, 완전한 충만, 완전한 기쁨 그렇게 완전한 것이 배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게 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더 이상 다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바울은 이것을 경험하고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그의 삶 가운데서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확인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진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전에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것, 더 재밌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그리고 더 높은 것을 성취하고자 성공을 위해서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치 유명한 축구 감독의 말처럼 ‘나는 항상 배고프다’ 그런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가 그 예수님을 생명으로 만나 이제 예수님을 실제로 우리 안에서 체험한다면 더 이상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충분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행복했던 적이 있습니까?
진짜로 행복했던 적이 있습니까?
내가 정말 행복했다면 그다음부터는 그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배부르게 밥 먹으면 다시 꼬르륵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맛있는 것을 주더라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에는 뭐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배가 부르면 앞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두어도 더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 좀 먹어봐 이거 얼마나 맛있는데.”
“아무리 맛있어도 괜찮아. 배불러가지고 못 먹겠어.”
그런데 배고프면 맛없는 것도 서로 먹겠다고 달려듭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우리는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완전한 행복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먹어보지 않은 맛있는 것은 또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거 먹고 싶다.’
우리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 한 번 맛있게 먹어봤던 음식입니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것을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어보지 않은 어떤 음식이나 과일을 누가 내게 말해줍니다.
“내가 이번에 여행 가서 먹었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어.”
얼마나 맛있는지 아무리 자랑해도 그것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군침이 돌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여행 가서 그 음식을 먹어봤던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군침이 돕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복했던 적이 없는데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행복했던 적이 없는데 자꾸 행복을 찾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언제 행복했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DNA 안에 행복에 대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었을 때 사람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에덴이라는 뜻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을 우리말로 풀어 다시 쓰면 행복동산입니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행복했습니다. 우리 DNA 안에 안에 그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찾고자 하는 행복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와 목적은 한 마디로 행복 아닙니까?
당신은 왜 성공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왜 공부 잘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왜 건강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왜 이기고 싶습니까?
다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뭐라고 예수님의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거룩함(성결함)이 행복!
지금 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막절 행사에서 왜 계속 물을 붓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셔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렇게 풍성한 열매로 큰 수확을 얻었으니 감사합니다.”
이 감사함으로 일주일 동안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추수요 우리의 진정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추수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인생에 뭔가를 저장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인생의 금고 안에 돈을 저장하기 위해서, 지식을 저장하기 위해서, 성공을 저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농사짓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땅 위에 우리에게는 두 개의 창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이 땅의 삶을 저장하는 현실의 창고입니다. 그런데 이 창고는 그림자입니다.
또 하나의 창고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창고입니다. 이 창고가 진짜입니다.
이것을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계속 이 땅에서의 창고에 곡물을 많이 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밭이 있습니다. 그 밭에서 추수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비교합니다.
‘나는 밭농사하고 있는데 저 집은 논농사하고 있네. 그럼 나도 논농사해야 되나?’
‘나는 팥 심었는데 저 집은 콩을 심네. 그럼 나도 콩 심어야 되나?’
갈등합니다.
다 밭이 다릅니다. 작물이 다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작물이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작물이 따로 있습니다.
밭의 크기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밭을 절대적으로 주시지 상대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상대적으로 인생의 사이즈를 이해합니다.
‘저 사람은 밭이 만 평이네. 나는 10평밖에 안 되는데. 나도 열심히 해서 만 평 만들어야지.’
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땅이 만평이든 10평이든 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땅의 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밭을 스스로 밭의 크기를 늘리려고 애 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 밭에 어떤 작물을 심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10평이라면 10평만큼의 추수를 하면 됩니다.
저 사람이 만 평이라면 만 평만큼의 추수를 하면 됩니다.
10평에서 10가마니 얻었다면 만 평 땅에서 만가마니 얻은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비교합니다.
‘저 사람은 만가마니 추수했는데 나는 열가마니밖에 추수하지 못했으니 실패했어.’
그래서 스스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가난하다고 여기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삶에 경계를 정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의 규모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무조건 많으면 좋고 무조건 크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의 헛된 욕망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10평 주시고 거기에 농사지으라고 하시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농사 지으면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 심어서 잘 추수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삶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창고를 채우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할 추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목양을 통해서 얻는 진짜 추수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열심히 제게 주어진 목양과 목회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진리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무엇보다 우리 제일교회에 와서 하늘 창고에 많은 상급을 쌓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일을 잘 해야 합니다.
그걸 잘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들어야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어야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상급 하는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해서 제가 정말 얻어야 될 저의 추수는 교회 사이즈나 사람 숫자, 교회 헌금이나 교회 재정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더 얻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만나면서 설교하면서 목양하면서 제 안에 그리스도가 계속 더 채워져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창고를 잘 채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창고도 가득 잘 채워야 합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안주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잘 살았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더 얻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돈을 법니다.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만큼 인생의 재물을 쌓아야 합니다. 그만큼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10평 땅에서 5가마 정도밖에 추수하지 못했는데 나는 10가마 꽉 채워서 완전하게 추수를 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로 초막절을 지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얼마나 추수했어? 그렇게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돈 벌었는데, 땡볕에 온몸을 거슬리면서 열심히 일해서 쌀은 많이 거뒀는데 예수는 얼마나 거뒀어?”
“예수요 그게 뭐에요? 농사 잘 지어서 쌀만 많이 거두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 땅에서의 창고는 가득한데 하늘나라의 창고는 다 비었구나.”
이것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 땅에서 창고는 가득 쌓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그 말씀을 하십니다.
온통 추수 잘 됐다고 풍년이라고 즐거워하고 잔치합니다.
창고에 내년 추수할 때까지 일년내내 먹을 곡식들이 가득 쌓여서 안심하고 평안하고 기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셔서 물으십니다.
“하늘 창고에는 얼마나 쌓였어?”
“너희들이 해야 하는 진짜 추수는 나를 추수하는 거야.”
“내가 너희들의 인생의 진짜 열매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영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확장되시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강해지시고, 내 안으로 그리스도가 더 들어오시고,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있는 삶을 계속 다르게 바꿔 표현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8, 39절)
요한이 자세하게 설명까지 합니다.
그리스도를 추수하는 것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
그리스도로 강해지는 것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 18)
이것이 하박국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올해 수입이 내가 원하고 목적했던 것만큼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자.’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올해 1억 벌어야 되는데 6천밖에 못 벌었지만 이거라도 감사하자. 이거라도 만족하고 이거라도 기뻐하자.’
이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6천만 원을 버는 동안 이 돈만 번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좋은 그리스도를 얻었다. 이 땅의 보화는 비록 덜 모았지만 땅의 보화를 얻는 동안 진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얻었다. 그래서 감사하다.’
이 뜻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고 외양간 송아지가 없어도 올해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기뻐하자는 뜻이 아니라 무화과나무 열심히 얻으려고, 포도나무열매 많이 얻으려고, 소와 양 많아지게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고 애를 썼지만 내 생각과 기대만큼 얻지 못했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얻었음으로, 여호와로 인하여 충만해진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없어도 만족하고 기뻐하라는 말씀, 그것조차도 없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족하라는 말씀, 그래도 너는 땅이라도 있고 외양간이라도 있지 않냐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뻔한 말은 세상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자도 사상가도 다 그런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굳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보화가 되는 것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에서 추수하는 것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더 묵상되고 더 붙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지식이 아니라 실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 예수로 충만한 것을 꼭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를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빈손으로 왔습니다.
“왜 예수 안 잡아오고 빈손으로 왔냐?”
물어보니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서 보니까 우리가 그 사람을 잡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국자들이 열 받아 묻습니다.
“너희도 그 사람한테 넘어갔어? 너희도 그 놈한테 홀렸구나.”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7-49절)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을 뭐라고 말합니까?
“똑똑하고 뭔가 생각이 있고 뭔가 아는 사람들은 교회 안 다녀.”
“신이 어디 있어? 어리석고 미련하고 멍청한 연약한 인간들이나 신을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지.”
“지성이 있는 사람, 제대로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 지성도 없고 불경건하니까 예수나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것이지.”
이렇게 교회를 욕합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비난하고 힐난합니다.
두 가지 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람들이 우리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볼 때 생각 없이 예수 믿고 그냥 무턱대고 예수 믿고 교회에 막 그렇게 빠져서 광신도처럼 믿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럼 어떤 모습이 니고데모의 모습입니까?
성경을 해박하게 알고 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지성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이런 무리들이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마음의 팔짱을 끼고 앉아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못 배워서 저래.’
‘예수 믿어도 좀 젊잖게 믿지 저게 뭐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진짜 지성이 무엇인가?
진짜 경건이 무엇인가?
니고데모가 정확하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절)
진짜 지성은 무엇입니까?
경건은 무엇입니까?
진짜 지성은 사람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말이 그 사람의 진짜 지성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신학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박사학위 받고, 세상적으로 대단한 학벌을 가지고 있고, 논문도 쓰고 책도 썼을지라도 그것이 지성은 아닙니다. 지성은 우리의 언어입니다. 낫 놓고 기억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말이 지성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 교수이고 뛰어난 학자일지라도 그 말이 지성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대구의 모 대학 교수님이 살고 계신데 참 점잖으신 외모에 말이 참 거칩니다. 시장에서 쓰는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렇다면 아무리 대학 교수라고 해도 지성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점잖게 예배드리고 기도할지라도 지성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가 지성입니다.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뛰고 소리 지르면서 기도할지라도 지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그 사람의 지성입니다.
진짜 경건은 무엇입니까? 행동입니다.
우리의 말이 지성이고 우리의 행동이 경건입니다.
말씀을 쭉 이어보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해졌다는 것이 증거로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창고 한 번 열어봐! 나 부자야! 내 창고가 이만큼 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창고만 봅니까?
“창고가 진짜 크다. 어마어마하네. 부자구나!”
그런데 그 창고가 비었다면 뭐라고 합니까?
“야 창고 한번 열어보자. 얼마나 찼나. 창고만 크면 뭐해? 그 안에 가득 차야지!”
그리고 열어봤는데 그 안에 가득 차 있으면 진짜 농사 잘 지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텅 비었으면 창고만 큰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충만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세월이고, 내가 교회 했던 사역들이고, 교회 신앙의 이력들 아닙니까? 그게 우리 창고입니다.
몇 십 년 교회 다녔어.
몇 십 년 교사 했어.
몇 십 년 찬양대 했어.
이것저것 다 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하고 창고 한 번 열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로 얼마나 충만한지, 믿음의 창고 안에 얼마나 예수가 가득 찼는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 사람의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와 상관없는 말, 생명과 상관없는 언어를 계속 쓰고 있습니까?
생명의 언어를 써야 되는데 내 말은 조금도 생명의 언어가 아닙니다.
내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되고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내 육신을 만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데 계속 나라고 하는 육신을 만납니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창고는 아무리 클지라도 비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정리하겠습니다.
이 하루가 그리스도를 추수하시고, 그리스도를 열매로 맺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더 들어오시고 그리스도가 더 확장되시고 그리스도가 더 강해지시고 그리스도가 더 늘어나서 우리의 인생의 창고, 이 땅의 창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도 가득 차는 복된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더 그리스도 얻기 원합니다. 더 그리스도로 충만하길 원합니다. 더 그리스도를 추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심는 날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하여 믿음을 경작하는 날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가 그동안 심고 경작했던 것들을 추수하는 하루가 되게 해 주셔서 예수 부자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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