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8:42-59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돌려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매우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44절)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절)
이것이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이 굳게 믿었던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음란한 데에서 나지 않았다.’
스스로 서자가 아니라 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갈이나 그두라를 통해서 태어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사라를 통하여 태어난 아브라함의 적자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믿었습니다. 이방신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앗수르의 침공과 블레셋의 침공, 애굽의 침공, 여러 나라들의 침공과 지배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 너희들의 아비가 아니라 마귀가 너희 아버지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그들이 예수님께 당하는 모욕과 수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한테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귀신 들렸다고도 하고 사마리아 사람이냐고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흥분할 정도로 매우 모욕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주님이 보시는 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적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주님도 그렇게 나를 보십니까?
아닙니다.
이 점을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주님은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
이것을 말씀 안에서 늘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향하여 주님이 ‘너희들의 아비가 마귀다’라고 하신 이유가 세 가지입니다.
욕심, 살인, 거짓말
욕심에서 살인과 거짓이 나오는 것입니다.
욕심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세 가지 요소가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아닙니까?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세상은 보통 생각합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내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 내 살림살이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토록 수고하며 애쓰며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욕심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욕심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도 하고 거짓말도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세 가지 행복의 요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우리의 욕망이 채워질 수 없고, 정상적으로 우리의 쾌락이 채워질 수 없고, 정상적으로 우리의 살림살이가 남들한테 자랑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얻을 수 없으니까 거짓말도 하고 살인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욕심에서 이 모든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욕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짓말하거나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남의 것을 더 내 것으로 가져와야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한데 그것을 내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남의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들을 잘 가져오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이다’라고 인정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 18)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도 무화과나무, 포도 열매, 양떼와 송아지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만으로 행복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는 내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가져옵니다. 남의 집 외양간에 가서 소를 끌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인류의 첫 번째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뱀이 하와에게 찾아가서 하는 말입니다.
“저거 먹으면 하나님이 정말 죽는다고 그랬어? 아니야 저거 먹어도 안 죽어. 저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
이렇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어떤 거짓말로 이어집니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거짓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류 최대의 거짓말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이단 아닙니까?
모든 이단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교주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욕심 때문에 다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 살인은 무엇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아벨’의 이름은 원래 ‘헛됨’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것이 역사 안에서 이렇게 실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즉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거짓과 살인,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거짓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
“나는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았어.”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다음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생명이심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안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서 하신 일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뛰어난 선지자, 탁월한 선생,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 정도의 수준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술램프의 지니 정도밖에 더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지,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항상 옳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틀렸고 하나님이 항상 100% 옳다는 뜻입니다.
나는 항상 틀렸고 말씀이 100% 옳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예수님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나와 전혀 상관없이 읽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종교인처럼 생활하면서도 마귀 새끼들이었구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불쌍히 여길 필요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습니다.
나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혀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기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도 아니고 하갈의 후손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의 후손도 아니고 사라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간음해서 태어난 자손도 아니고 적자나 사생아도 아니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신도 섬긴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 섬겼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거짓말도 아닙니다.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들입니다.
또 다른 이방신들을 섬긴 적이 업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많은 이방신을 섬기는 유혹 가운데에서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말은 맞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 안 지켰습니까?
그들이 율법 조문 하나하나를 어겼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단지 율법만 보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 이정표가 보이면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정표 앞에 서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됩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이정표가 뭐가 중요합니까?
그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가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데 이정표만 붙잡고 있는 것과 율법만 붙잡고 있는 것이 똑같습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만 붙잡고, 성경만 파고들고 성경만 연구하고 성경만 암송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은들 뭐하겠습니까?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관한 지식 자체가 목적이 되면 바리새인들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말하듯 우리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야.”
그렇게 스스로 말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실 것입니다.
“네 아비는 마귀야.”
만일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이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할 것입니다.
“귀신 들린 거 아니야?”
“사마리아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구나.”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갈릴리 사람이십니다.
감정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귀신이 들립니까?
우리는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엄청나게 두렵고 떨리는 행동을 하십니다.
“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절)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교회에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예수교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모든 교회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 예수를 생명으로 고백하는 교회, 그래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것이 생명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욕망이 우리의 생명이고, 쾌락이 우리의 생명이고, 살림살이가 우리의 생명이라면?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만 채워달라고 합니다.
“내 인생이 너무 괴롭습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십시오.”
“살림살이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을 증거 할 수가 없습니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게 해주세요.”
말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살림살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할 때 무엇을 구합니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더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 만나길 원합니다.
내가 그분 앞으로 더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내 안으로 더 들어오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만이 내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이고 나의 만족이고 나의 자랑입니다.
이런 교회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때 교회는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성도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들어오신 주님이 못 살겠다고 나가시지는 않습니다.
계속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존중하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것만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욕망과 살림살이는 그분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인 우리도 다른 사람의 모습을 요구하면 못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자아를 요구한다면 한두 번은 노력해서 맞춰줄 수 있지만 평생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 인격과 성품과 자아로 살아갈 때 가장 편하고 즐겁고 안정적입니다.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야 하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우리도 그런데 주님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본성과 본질에 맞는 것을 우리가 구해야지 예수님의 본질과 다른 것을 자꾸만 요구하면 그분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가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진짜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계속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본성은 이런 분이다.
예수님의 본질은 이런 분이다.
예수님의 성품은 이런 분이다.
예수님의 뜻은 이렇다.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하고 결혼해도, 그래서 다 아는 것 같아도 막상 결혼하면 배우자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혼초에는 어떻게 합니까?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를 요구합니다.
아내도 남편한테 자기를 요구합니다.
한두 번은 해주지만 계속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러다 보니 갈등과 시비가 붙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면서 교제하고 사귀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내는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기질이고 이런 성품이구나. 이런 삶의 스토리가 있었구나.’
그러면 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내의 본성과 아내의 본질에 맞는 것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요구합니다. 남편이 그것을 못해주면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갈등 가운데 남편을 이해하게 됩니다. 남편의 본성과 본질과 성향과 기질 그리고 삶의 스토리를 통해 만들어졌던 지금의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게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사귐이고 교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거리가 있을 때에는 예의를 갖추고 상대방을 대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친해져서 허물없는 관계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나처럼 대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저를 대하고 저는 저를 대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대합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예의를 갖추고 매너 있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친해지면 남편은 아내를 자기를 대하듯 대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자기를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도 사귐도 아닙니다.
진짜 사랑하는 관계, 교제하는 관계, 교통하는 관계, 친밀한 관계는 그 사람의 방식대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귐입니다.
오랫동안 이 사람하고 친하게 지냈다고 하여 내 방식대로 그 사람을 대한다면 그런 관계를 뭐라고 합니까?
무례하다고 합니다.
그건 폭력 아닙니까?
예수님과 사귄다는 것,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과 친해져서 예수님이 내 소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예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으로 예수님과 사귀고 교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계속 사귀어야 그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분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분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분이 왜 오셨는지, 그분은 뭐 하시는 분인지, 뭘 하셨던 분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성이 이런 분이구나.’
‘예수님은 본질이 이런 분이구나.’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셨구나.’
예수님을 이해하면 예수님의 본성과 본질에 맞게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만을 우리가 예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주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친해졌다고 해서 전에 부탁하지 못했던 것 해달라고 하려고 예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본성과 맞지 않은 것을 해달라고 하기 때문에 하실 수 없습니다.
제가 본성과 정 반대의 것들을 해달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안 하실 것이고 못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나가신다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분의 본성에 맞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이 일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시니 없는 것 아닙니까?
집 안에 사람이 있지만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100% 옳습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게 있을 때 내 삶이 생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님의 본질과 본성과 주님의 생명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 생명을 더 구하오니 우리 가운데 더 찾아와 주시고 우리 가운데 더 드러내시고 우리 가운데 더 밝혀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더 정확하고 온전하게 만나고, 주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도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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