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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답안지에 답이 없을 때(요한복음 9:1-12)

답안지에 답이 없을 때 설교동영상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요한복음 9:1-12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첫 번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두 번째 표적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세 번째 표적

오병이어의 네 번째 표적

바다 위를 걸으신 다섯 번째 표적

그리고 소경을 눈 뜨게 하신 여섯 번째 표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방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시 어디쯤이라 여겨지는 곳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
이 때 보셨다는 원어를 살펴보면 지나가다가 본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소경이 구걸하고 있으니까 주님이 그 사람을 주목해서 뚫어지게 자세히 보고 계셨음을 뜻합니다. 그런 예수님께 제자들이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2절 참조)

당시 유대인들은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부모의 죗값은 자식이 치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변에도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부모의 죗값은 부모가 받지 자식이 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 자식이 저렇게 고생을 하나.’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듯 그들도 그렇게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랍비들은 태중의 태아까지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은 당시 그들의 문화 안에서 보편적이었던 생각이 반영된 궁금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부모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때문일까?’

이것은 제자들만의 궁금함이 아니라 당시 이 소경을 바라본 대부분의 사람들의 궁금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대답이 아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여자를 돌로 쳐야 합니까 아니면 용서해줘야 합니까?”

그들이 제시한 답안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 중 하나가 아닌 제3의 답을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돌려 쳐라.”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죄입니까, 자식의 죄입니까?

둘 중 하나를 답해 달라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번에도 제3의 대답을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다.”(3)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고르고 있는 답안지 가운데 답이 없을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정해둔 답안지 안에 인생의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답을 찾는데 그 안에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보기 4개를 두고 인생의 답을 고르려고 합니다.

4개 중 하나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1번일까? 그런데 답이 아닙니다.

아니구나. 그러면 2번일까? 그런데 2번도 아닙니다.

3번이라고 수정해서 정합니다. 그런데 3번도 답이 아닙니다.

4번이 답이 맞았네. 확신하고 4번이라고 믿습니다. 1, 2, 3이 답이 아니었으니 4번이 답이어야 맞는데 4번도 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4개 중 답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 4개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만 답을 찾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내가 정한 4개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4개 밖에 답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못 찾는 것입니다.

4개 중 하나가 답이면 찾겠지만 다른 데 답이 있으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 제자들처럼 그리스도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1 뭐가 답이에요?”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1번이라고 미리 써 놓고 이게 답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1번이 답이길 바랍니다.”

그러다 1번이 아니면 어떻게 합니까?

2번으로 답을 바꾸고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난번 1번은 제가 틀렸습니다. 2번이 답인 것 같습니다. 2번이 내 인생의 답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정해놓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이렇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닫힌 기도입니다.

4개 가운데 답이 없는데 그 중 하나가 답이었으면 좋겠다고 답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닫혀 있는 기도입니다.

열린 기도를 하려면 내가 먼저 답을 정하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님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렇게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저 소경이 왜 저렇게 태어났을까? 부모의 죄 때문일까?”

내가 저 소경의 부모를 잘 아는데 그 사람들이 자식이 벌을 받을 만큼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그럼 저 소경이 태중에 뭔가 잘못했나?”

아무리 설왕설래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는 거예요.
어찌 보면 엉뚱해 보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예수님께 질문하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닫힌 기도 하지 말고 열린 기도하십시오.

세상은 내 인생의 답이 4개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답이 무엇인지 저는 알 수 없으니 주님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열린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 소경을 바라보는 시선을 잠시 보려고 합니다.

소경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다릅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존재의 원인을 묻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시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이었습니다.

완전히 시선이 다릅니다.

우리들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시선도 제자들의 시선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 이렇지?’

이 문제가 왜 일어났지?’

저 사람이 왜 그렇지?’

우리 교회가 왜 그렇지?’

자꾸만 원인을 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목적이 뭐야?”
무슨 일을 하려고 이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목적을 질문하지는 않습니다.

문제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시선을 우리에게도 적용해야 됩니다.
제자들처럼 자꾸 원인을 찾습니까?

제자들처럼 자꾸 원인을 묻습니까?

원인 알아서 뭐 하려고 합니까?

원인이 뭐가 중요합니까?

부모의 죄이든 자기의 죄이든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의 죄라고 밝혀져서 부모가 회개하면 아이가 낫습니까?

아이의 죄라고 밝혀져서 아이가 반성하고 깨달으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까?

원인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에 질문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호기심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뿐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질문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

이유가 뭘까?’

이것만 질문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에만 머물게 됩니다.

원인을 묻는 질문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목적은 앞을 바라보는 것, 미래 지향적입니다.

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시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삶이냐 미래를 바라보는 삶인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왜 그런지 이유와 원인이 알고 싶습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원인과 이유를 알아서 속이 시원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꾸 묻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과거에 묶어둡니다. 계속 과거 안에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전진입니다.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뒤로 후퇴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어도 안 됩니다. 서 있는 것은 뒤로 가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전진하는 삶, 미래지향적인 삶을 원한다면 항상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 인생 안에 일어난 이 사건의 목적이 무엇인가?”


원인을 물어보는 과거 지향적인 질문은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정한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부모의 죄와 본인의 죄라는 두 개의 답안 밖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인과 이유를 알려고 하는 과거 지향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서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 상황의 한계, 소유의 한계 이상을 기대하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만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는 미래지향적인 시선은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능성은 수만 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와 소망이 됩니다.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이상의 것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가진 인생의 자원 안에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만 씨름합니다. 내 자원이 부족하면 걱정하고, 신음하고, 속상합니다. 그렇게 속상함이 커지다 보면 분노까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미래 지향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시선으로 내 인생을 바라본다면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어떤 답을 주실지 그 경우의 수가 무한대입니다. 열려 있는 삶입니다.

내 미래가 닫혀 있는 것이 좋습니까, 열려 있는 것이 좋습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삶은 시선 자체가 목적을 질문합니다.

믿음의 삶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믿음의 삶은 열려 있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의 매개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들은 세상에서도 다 합니다.

자기 개발,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원인에서 목적으로

한계에서 한계 없음으로

닫힘에서 열림으로

그 매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개가 되셨으므로 원인에서 목적을 향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원인에서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빠진다면 성경은 교훈에 불과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기개발의 이론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를 빠뜨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안에 답안지의 보기 외에 다른 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과거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미래에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닫혀 있는 인생이 아니라 열려 있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개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매개로 삶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소경은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저주받은 삶의 대표적인 인생이었습니다. 문둥병환자처럼 저주받은 인생을 대표하는 질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주받은 인생이 어떻게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인생 안에 찾아오심으로 그는 복도니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이 보셨다’(1)는 단어가 그냥 보신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의 인생 안으로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안으로 주님이 찾아오셨음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나도 이제부터 목적을 질문해야겠다.’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겠다.’

열려 있는 인생, 한계가 없는 인생을 살아야겠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이렇게 다짐한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믿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내 인생에 살아오셨다는 것이 확신이 들지 않고 희미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일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앞 못 보는 소경의 눈에 왜 침을 뱉고 섞은 흙을 바르셨을까요?

그렇게 하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제가 어릴 때 목사님들은 예수님이 침 뱉으신 진흙에 자꾸만 초점을 맞춰 설교하신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른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만으로도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에게는 유독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셨을까?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얼굴이 더러워져야 씻지 않습니까?

더러워지지도 않았는데 씻으라고 하면 씻겠습니까?

이 소경은 한 사람에게라도 더 구걸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실로암까지 가서 씻고 오는 일이 여러 모로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소경은 더러워졌기 때문에 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씻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얼굴을 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눈이 확 떠지고 앞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눈이 떠진 것은 믿음 때문입니까 순종 때문입니까?

말씀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믿음 때문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낫게 해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예수님도 이 사람에게 낫고 싶은가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이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씻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낯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밤이 되면 내가 일할 수 없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흙에 침을 뱉어 이겨 소경의 눈에 바릅니다.

이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걸인입니다.

오랜 시간 걸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누군가에게 따지거나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힘이 있어야 대들거나 싸울 터인데 힘이 약하니 마음도 약해지고 그러다 보니 항의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

다투지 않고 멱살 잡지 않고 항의할 수 없는 연약함에 있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주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더러워졌습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 일단 씻어야 합니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항의하지 않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떠졌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순종하면 내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주님은 꼭 믿음이 아니어도 역사하십니다.

지금까지 표적은 대부분 믿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의 포도주 사건도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하인들이 자발적으로 믿음으로 물을 떠서 아귀까지 채웠을 때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는 나한테 무슨 말이야? 약을 주든지 무슨 방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말로 일어서라고?“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기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떡을 떼어 나누어주는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소경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러워졌으니까 일단 씻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이 있을 때 일하십니다.

그런데 때로는 믿음이 없지만 삶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순종합니다. 본문 말씀은 특별하게 믿음이 순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람이 순종한 후 나중에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나의 이 증거를 보고도 모르겠냐고 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싸웁니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사람들이 질문할 때 패턴으로 계속 예수를 넣어서 똑같이 말합니다.

예수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더니 됐다고 합니다.

하라고 했더니 됐습니다.’

이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이 사람은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믿음이 역사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역사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가운데 있습니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속상합니까?

불가피하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더 믿으면 됩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믿음이 없는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씻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가서 씻은 것입니다.

순종하여 가서 씻었을 때 눈이 떠진 것처럼, 우리도 할 수밖에 없는 내몰리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 순종이 우리 인생 안에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을 더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더 믿게 될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찾아오셨는지 잘 모르겠다.’

확신이 서지 않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여기십시오.

나 혼자 힘으로 살면 내 인생은 원인에 묶여 있는 과거 지향적인 삶, 닫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인생 안에 오셨으니 주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내 인생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열린 미래가 될 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됩니다.

말씀이 그렇다고 하시니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내가 정한 답안지 밖에 답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믿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알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 가운데 있음을 믿고 나아가면 됩니다.

뭔가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까?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이 역사하시므로 나의 어두운 눈이 열리고, 믿음 없음이 믿음 있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반드시 더 밝아지고 새로워질 것임을 믿으십시오.

 

오늘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또 우리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그 일을 통하여 주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기대함으로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혹 믿음이 없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놀라운 주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소망이 되게 하시고 기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