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24-41
본문은 맹인과 바리새인들 간의 대화, 또 맹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맹인이 한 고백입니다.
맹인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안다’
맹인의 말을 통하여 요한은 ‘안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실제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절)
맹인은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사실 반박을 합니다.
“그건 아는 게 아닙니다.”
요한은 맹인의 입을 통하여 그런 앎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진짜 아는 게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앎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그렇다면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초점으로 본문 말씀을 읽어야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캐치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앎은 믿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즉 믿음은 진정한 앎에서 와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앎과 믿음에 관한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서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정말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가?’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갑자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맥락을 볼 때 참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인까?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실 이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계속 말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맥락상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종의 당시 숙어처럼 쓰인 말입니다.
“똑바로 얘기해.”
“진실을 얘기해.”
이런 뜻입니다.
표현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들립니다.
그래서 이 말이 당시 숙어처럼 쓰인다는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고 들립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지금 퇴색되었습니까?
내 진실을 확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차용해 쓰는 것으로 퇴색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증거로 대는 것.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사용한다면,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삼는다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되어야지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맹인이었던 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고친 예수가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분명히 압니다.”
이 때 ‘안다’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지식으로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하고 만나고 내가 체험한 것은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앎은 책을 통해서 배워 아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교회 다니고 설교를 들어서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이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 자기의 어둠을 밝혀주신 예수님, 내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인 줄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아무리 많이 성경을 읽고 배우고,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질병의 치유가 교회에만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다른 종교, 무속신앙 등 기독교 밖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그들이 믿는 신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이 너무 뚜렷하고 확실하니까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그곳은 진리라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참 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거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믿는 신이 제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체험이 가지고 있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앎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자세히 봐야 합니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지식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설교도 잘 들어야 합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체험 신앙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반면 말씀이 약했습니다.
체험은 굉장히 강한 데 반해 말씀은 너무 약하니까 한국교회의 기반이 약한 것입니다.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불었던 열풍이 바로 제자 훈련입니다.
그런데 제자 훈련 강해지면서 이제는 다시 체험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금은 예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제자 훈련을 할 때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어떤 체험을 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 같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한다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교회 모든 성도들이 원한다고 영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극소수만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신앙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흡사 교만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든요.
그런 분위기에서 교회 안에 제자 훈련이 밀물처럼 들어오니까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자 훈련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본인이 열심히만 하기만 하면 정해진 제자 훈련 과정을 마치고 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의 모든 과정을 수료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객관적인 표시가 교회 안에서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 훈련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자 훈련과정을 다 이수하면 교회에서는 사역을 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직자로 올라갈수록 제자훈련 과정의 요구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려운 제자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중직까지 맡게 되니까 굉장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체험들이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의 상황은 어떤지 아십니까?
체험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둘 다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신앙이 위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지식도 없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을 보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서 체험하고 경험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말씀 알기를 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지적 호기심인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더 헌신하고 싶은데 확신이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교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내가 이렇게 시간을 쓰면 안 되지.’
‘내가 물질을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이것이 두려우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물으실 것입니다.
“너 왜 시간 그렇게 썼어?”
분명합니다.
저도 주님 앞에 서면 굉장히 후회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주님을 더 알지 못한다면 분명히 후회할 것입니다.
분명히 저는 많은 시간들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돈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힘들을 낭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헛된 일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그분 앞에 설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압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조급한 것입니다. 시간을 제대로 써야 되고, 물질도 제대로 써야 되고, 생명을 추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내 몸에 새겨진 죄의 DNA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과 싸워야 되는데 그것과 싸우려면 그리스도를 더 알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아야 되고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 경험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지금의 앎과 경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제가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한 쪽 얇은 옷자락 살짝 만진 정도입니다. 지나가시는 그분의 옷자락에 살짝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부딪힌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자기 옷을 만진 그 여자를 만나려고 찾으셨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능력 있는 자야.”
이렇게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런 욕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주님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 때문입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병이 낫는 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에서 더 나가야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은 주님의 옷자락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변화될 만큼 주님은 강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주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주님이 능력 있는 분으로만 알고 와서 목숨을 걸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사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부정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가 들키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로 나와서 주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진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어떻게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까?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와서 자기가 혈류병 걸렸는데 고쳐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뒤에서 몰래 만지면서 스쳤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서 그가 알고 있는 주님, 그가 경험한 주님 그 이상의 주님을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분이 단지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자를 멀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부정한 자를 접촉하셔서 오히려 더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구나.’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앎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이 여인을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만나는 그 만남으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더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만나야 합니다.
주님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더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낭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낭비하며 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대로는 많은 시간도 드리고 많은 물질도 드리고 많은 사역도 하지만 솔직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다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그렇게 했던 것이 정말 아까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그 시간을 내가 그렇게 쓰면 안 되었던 것인데.’
‘그때 그 돈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때 그 힘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 기회를 그렇게 낭비하면 안 되었는데.’
그때 더 잘 써야 되는데 괜히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더 알고 더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경험할수록 더 주님을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합니다.
경험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식이 경험보다 못하는 뜻은 아닙니다.
뒤에 보면 이 맹인이었던 자의 믿음이 달라집니다.
아는 자에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때 지식이 반드시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당신들은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 물어봅니까?”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사실은 이 말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감히 누가 바리새인들을 깔보고 모욕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의 앎이 강력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다 껍데기라는 것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바리새인들이 굉장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바리새인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절)
죄 가운데 태어났으면서 감히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기분 나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을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이런 말입니다.
“당신들도 예수 제자 되려고 해서 그렇게 궁금해 자꾸 물어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모르면 무시당합니다.
그리스도를 진짜 만나지 못하면 무시당합니다.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 수십 년 다녔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얼마 다니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깊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쁩니까?
그렇다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창피한 것을 모릅니다.
자기의 신앙 경력과 신앙 이력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앙 이력과 경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사람한테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주님 앞에서 큰일 납니다.
이 사람들이 막 발끈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절)
그들은 예수님을 얕보고 모세가 더 크다고 생각하고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모세를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진짜 모세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제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조차도 모르고 있고 그러니 모세의 제자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절)
이 맹인이었던 자의 논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다 안다고 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절)
성경에 맹인이 눈 떴다는 것을 당신들이 읽은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것이고, 저 예수가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라면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절)
그렇게 말한 후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출교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해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종교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 종교 시스템 안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쫓아내지 않아도 이미 종교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니까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경험하고 만났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체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서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남편을 알고 남편이 아내를 안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앎이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연애한 후 결혼을 해도 결혼을 하고 나니 배우자를 모르겠습니다.
결혼하고 나니까 진짜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연애할 때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아무리 오래 만났어도, 그래서 잘 안다고 확신하여 결혼했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되면 다른 여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때 비로소 ‘안다’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단어가 바로 그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진짜 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부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연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연애하는 수준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 완전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세히, 실제로 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결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살아갑니다.
불완전하지만 신랑과 신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잘 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면 주님이 이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인자를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아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앎은 반드시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이런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인자가 누구십니까? 제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앎에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37절은 9장 전체 핵심이 되는 이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미 봤다고 하십니다.
이미 봤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만난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인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은 언제 떠졌습니까?
요한은 묻습니다.
“진짜 눈 떠지는 게 무엇이냐?”
보이지 않던 육신의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즉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 때 우리의 눈이 떠졌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이 떠진 것은 언제입니까?
“내가 그다!”
“내가 인자다!”
“내가 그리스도다!”
이것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이 사람의 눈이 진짜 떠졌습니다.
그동안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예수를 봤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실로암 못에서 씻은 후 눈을 뜨게 되었고 그 때 예수를 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맹인이 아니니까 다 예수를 봤습니다.
다 봤지만 그가 인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다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39, 40절)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맞습니다.
맹인입니다.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보고도 하나님인 줄 모르는 자들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영적인 맹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 읽을 때에도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진짜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내게 오신 하나님인 줄 진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신 줄을 믿고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영적인 맹인입니다.
한 번에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한 번에 떠지지만 영적인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맹인을 치유할 때 일입니다.
“뭐가 보느냐?”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게 보입니다.”
더 물어보십니다.
그렇게 그 맹인의 시력이 점점 회복되고 선명하게 보이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영적인 시력도 한 번에 떠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열립니다.
희미하게 보이다가 점점 자세하게 보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하고, 더 보기를 원하고, 더 만나길 원하고, 그리스도를 더 체험하기 원해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분명한 지식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체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체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도 같이 가야 합니다.
영적인 지식과 영적인 체험은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 읽어야 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읽지 마십시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목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증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필요하면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바탕이 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 착각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영적 체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봐도 영적 체험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더 들어가서 모든 삶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고 하늘에 쌓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더 열어주셔서 주님을 선명하게, 말씀을 선명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아직은 세상이 더 잘 보이고 하나님 나라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많은 것들이 낭비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보지 못하면 계속 낭비할 수밖에 없사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세상은 더 어두워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더 선명하게 보이는 믿음에 이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결코 낭비되지 않고 주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되고 쓰임 받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천국의 상급을 많이 받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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