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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좋은 양 되기(요한복음 10:22-42)

좋은 양 되기 설교동영상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10:22-42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라!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미 충분히 많이 얘기했는데 단지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 뿐이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이 아니라니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 아닙니까?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주께서 택한 양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논쟁들이 있습니다.
이미 주님이 양으로 택한 사람이 결정되었다면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있겠나?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의 양으로 결정된 사람들은 어차피 다 믿게 될 것이고, 아무리 전도해도 주님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은 자들은 주님이 양으로 결정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소용없는 것 아닌가 하며 극단적으로 논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구원을 받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 선택한 양이든 아니든 굳이 그것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 구별해서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이미 결정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그냥 주의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전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열매가 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그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고, 또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씨를 뿌리면 됩니다. 자라고 추수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냥 뿌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확신 없이 전도의 씨를 뿌릴 수 있습니까?

하다못해 맛집 하나를 발견해도 어떻게 합니까?

그 식당 정말 맛있더라. 언제 한번 내가 꼭 데려갈게. 같이 가자.”

이렇게 알리지 않습니까?

식당 주인이 자기 식당 홍보해 달라고 공짜로 음료수라도 준 것도 아니가 돈을 준 것도 아닌데 맛집을 발견하면 스스로 알아서 광고하고 다닙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좋은 건 사람들에게 선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게 좋은 분이라면, 어떤 맛집보다 교회가 좋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교회 가자고 초청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없다면 전도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꼭 그것이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의 기질이나 성향 자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편하도록 설명하자면 영업이 굉장히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업이 재밌고 즐거워서 영엉 실적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고 늘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런 것을 예외로 두고 복음의 생명이라는 측면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고 소망이고 능력임을 분명하게 알고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연습하는 곳임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면 전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가자!”

예수님 한번 믿어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는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교회로 데리고 오는 전도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을 계속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를 계속 성장시킵니다.
회사에서 알려준 대로 그냥 물건만 파는 영업사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정말 유용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이 것이 더 좋은 제품이 될 수 있도록 계속 회사에 피드백을 합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다 보니 이 부분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보완해서 다시 만들어주십시오.”

이렇게 의견을 냅니다.

전도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은 분이고 너무 귀한 분이고 교회가 너무 행복한 곳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전도하다 보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뭐 저래?”
나 때문에 누군가 교회에 오는데 장애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 사람들로 하여금 주께로 오는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좋은 모습들을, 교회의 좋은 모습들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내 삶을 계속 개선하지 않습니까?

마치 영업사원이 자기 회사의 제품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계속 개선되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주님은 고칠 점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잘못된 것도 없는 완벽하고 무결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전하는 내가 문제가 있으면 그들이 나에게 실망하고 복음에 대해서 문을 닫고 귀를 닫아버릴 테니까 계속 나를 개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계속 성장합니다. 계속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내가 얻는 열매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알곡으로 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실 안에 있는 학생에 불과합니다.

계속 배우기는 하는데 아무 것도 밖에 나가서 하지 않는 학생

왜 우리가 기술을 배웁니까?

그 기술을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목공을 배워서 좀 돈 벌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나에게 일거리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도록 계속 개발하고 실무에서도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일당으로 10만 원 받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실력이 되지 못해서 8만 원만 줍니다.

내 실력이 8만 원밖에 안 되는구나. 더 연습하고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경력이 지나면서 실력이 쌓이다 보면 일당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교실 안에서 연습만 한다고 그렇게 실력이 올라갑니까?

현장에 나가서 실제로 해봐야 합니다.

교실 안에서 이렇게 잘라보고 저렇게 잘라보고, 이렇게 못 받고 저렇게 못 받고, 이렇게 붙이고 저렇게 붙여서는 알 수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직접 공사 현장에서 잘라보고 붙여보고 못도 박아보면서 현장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기술이 더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현장도 없이 교실 안에서만 계속 한다면 그것은 취미입니다.

단지 취미로 할 뿐입니다.

너무 재미있다고 합니다.

목공이 뭐 재미있느냐고 하겠지만 재미있는 사람은 그 일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이렇게도 잘라보고 저렇게도 잘라보고, 그러면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너무 재밌으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취미입니다.

물론 취미도 실력은 늘어납니다.

그러나 현장 없이 교실 안에서만 취미로 늘어나는 실력과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엉뚱하게 만들기도 하고, 주문한 것을 잘못 이해해서 엉뚱하게 만들어서 다 뜯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돈도 못 받는 등 이런 일들을 계속 겪어가면서 그의 실력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교실 안에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취미처럼 하면 재미있긴 합니다.

교회도 재미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까 신기합니다.

좋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싫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새롭게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우는 것은 정말 큰 즐거움입니다.

교회 생활도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고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 것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그냥 종교취미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취미 수준에서의 실력입니다.

취미 수준에서의 성장입니다.

현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현장이 무엇입니까?

우리 삶이 바로 현장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삶이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생존과 생계를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생명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무엇이 생명입니까?

생존은 너 죽고 나 살자입니다. 나만 살면 됩니다.

공생은 같이 살자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남들이 어떻든 나는 일단 살아야 돼.’

한 사람만 살아야 한다면 무조건 내가 살아야 한다고 하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이보다 조금 훌륭한 사람들은 같이 사는 것입니다.

나도 살아야 되고 당신도 살아야 하고.’

이것이 공생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생명입니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너만은 살아야 돼.’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생존을 살고 있습니까?

공생을 살고 있습니까?

생명까지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이 없이 말에만 그치면 어떻습니니까?

생존과 공생과 생명을 구분해서 설명하니까 꽤 괜찮게 들립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식의 기쁨이 있습니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멋지게 알려줘야지.’

그런데 이것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나만 기분이 좋으면 됩니다. 나만 괜찮으면 됩니다. 나에게 유익하면 됩니다. 나만 편하면 된다면 이것은 생존의 삶입니다.

지식으로 있을 때에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때에는 스스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내가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자인지, 공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인지 보입니다.

간단합니다.

나만 좋으면 뭐 해, 다른 사람들 좋아해야지.’

나만 맛있으면 뭐 해, 다른 사람도 맛있어야지.‘

내 입맛에만 맞으면 뭐 해, 다른 사람 입맛에도 맞아야지.’

이것이 공생입니다.

공생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한 끼 밥을 하더라도 내 입맛에만 맛있게 할 수 있습니다. 나한테 간 맞추면 나는 맛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내 입맛이 다르다면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는 것이 바로 공생입니다.

그래서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한테만 맞추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고려하고 맞추는 것이 공생인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공생의 수준까지는 되는데 정말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수 있을까?’
이 사람과 나는 전혀 다릅니다.

음식의 기호부터 다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끼 정도는 못 먹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도록 그들의 입맛에 맞춥니다. 나는 억지로 맛 없이 먹거나 도저히 못 먹겠어서 한 끼 굶을 수도 있습니다. 굶어서 배에서는 꼬르륵 거리는데 다른 사람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을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적용됩니다.

때문에 일상에서 이것을 계속 훈련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영역에서 더욱 확장되는 것 아닙니까?

밥 한 끼 정도야 내가 안 먹고 다른 사람 입맛에 맞춰주는 것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횟수가 늘어나고 그런 영역들이 좀 더 이렇게 확장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통하여 교과서가 아닌 삶의 현장을 통해서 내 신앙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의 현장입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전도는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만 국한시켜서 보지 마십시오.

꼭 어디에 가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증인의 범위입니까?

증인은 순교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단어 자체가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모든 삶의 영에게서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그 사람들을 살리는 것, 단순히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생명인지 아닌지 결정은 주님이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이 생명으로 인도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원하는 마음,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나의 삶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장을 위해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에서 봐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양으로 결정됐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양으로 결정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나는 주님의 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주님의 양으로 결정이 됐다면 두 가지를 노력해야 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

주님의 양으로 결정된 사람들은 주의 음성을 잘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양들이 주님의 음성을 소리로 듣기는 합니다.

그런데 듣는다는 말씀이 소리로 듣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양들이 주인이 가자고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솔로몬 행각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다 듣습니다.

들리지만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으로 선택된 것으로 만족하고 끝내지 마십시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훈련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간혹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을 실제로 귀로 주님의 소리와 음성이 들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들린다고 하는데 정말 들리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면 그 말씀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는데 어떻게 안 받습니까?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이 내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안 받습니까?

때문에 모든 말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들으려고 주님의 말씀으로 받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이 가져야 할 첫 번째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따라야 합니다.

가자!”

목자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자기 목자가 아닌 다른 목자가 와서 가자고 하면 안 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주인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가 가자고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따라가야 합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주님의 음성인 줄 깨달으면 그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놓치지 않으시고,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항상 나를 지키신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런 염려는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염려를 하지 말고 계속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는, 본문 말씀처럼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잘 따라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계속 애쓰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신랑이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당신 내쫓지 않을 거야. 난 당신하고 영원히 같이 살 거야. 우리 인생에 이혼이라는 건 없어. 나는 끝까지 당신을 지킬 거고 당신과 함께 할 것이고 당신은 떠나지 않을 거야.”
신부가 이 말을 믿습니다.

신랑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어. 항상 나와 함께 한다고 했어. 내 곁에 있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다음에 신부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안심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까? 안 버린다고 했으니까 밥도 하지 않고 신랑이 말려도 놀러 다니고, 청소도 안 하면서 신부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랑에 대한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신랑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니까 혹 내가 사랑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그 사랑이 잘못될 수도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도 신랑을 더욱 사랑해야지.’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종종 실수합니다. 실패도 합니다.

우리 안의 여러 가지 신앙의 허물들이 자꾸 나타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내가 예수님 잘 믿어야 되는데 또 내가 범죄하고 실수하고 실패했네. 주님이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그러한 두려움 가운데 자꾸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축구 선수였던 사람이 우리나라에 어린이 축구 교실의 지도자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상을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 실수 안 하려고 하지 마. 잘못 패스할까봐 두려워하지 마. 실수해도 돼. 그냥 차고 싶은 대로 차. 패스하고 싶은 대로 해. 잘못해도 돼. 실수해도 돼. 지금 너희들은 실수해야 되는 때야. 잘못해야 되는 때야.”

잘못해도 되니까 마음껏 하라고 합니다.

실수해서 혹시 쫓겨날까봐 아이들이 공을 찰 때마다 긴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쫓을 일 없으니까, 이제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을 터이니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차라고 하는 말 아닙니까?

안 내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잘리지 않을 것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쫓거나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을 터이니 열심히 하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우리보고 마음 푹 놓고 게으르게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경주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분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이게 주님의 뜻인가?’

분별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유심히 말씀을 관찰하고 묵상하고 깨닫고 또 말씀을 적용해 보면서 열심히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성을 잘 듣는다는 말씀이고 결국 잘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일들을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따라가다가 힘들면 주저앉고 못 가겠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패해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가다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다시 수정하고 깨달아서 또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좋은 양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이 나를 양으로 택해 주시는 것을 감사합시다.

먼저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양으로 택하셨다는 것

나를 주님의 양으로 정하셨다는 것

그 무엇도 나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양으로 택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9)

이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택하셨다는 이 부분을 우리는 계속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데 더 좋은 양이 될 수 있도록, 더 좋은 양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오늘을 애쓰며 또 그렇게 경주하는 우리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양으로 불러주시고 택해 주시고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다고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의 음성을 더 잘 듣는 양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더 잘 따라가는 양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나를 알고, 즉 내가 주님과 더 깊은 교재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연합하며 하나 되는 믿음의 삶으로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