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요한복음 10:1-21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참 목자다’라고 당신을 드러내시고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목자이십니까?
모든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계신 목자이십니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인도하는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우리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할 때에는 공동체로 함께 예배하고 사역을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는 1대1의 관계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묻혀서 가는 게 아닙니다.
물론 교회의 영성과 나의 영성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을 끼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영성이 곧 나의 영성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교회와의 관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 일대일 관계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있는 교회, 믿음이 좋은 교회, 믿음이 뜨거운 교회, 믿음이 강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를 그렇게 믿음이 강하고 좋은 교회로 만들어가는 것 역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 믿음은 주님과 나 1대 1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할 때 반드시 주님을 인격으로 만나야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이름을 안다는 것은 부를 호칭을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이름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저를 아는 사람들입니까?
별개입니다.
지금 주님이 양들의 이름을 안다는 말씀은 양을 부를 호칭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호칭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야.’
‘그분이 예수님이야.’
‘그분이 그리스도래.’
이렇게 호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군지 압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구나.’
‘그분이 선한 목자구나.’
‘그분이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양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오셨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는 것과 주님이 정말 나의 목자이시고 나의 생명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나를 더 만족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아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성경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참 목자로 경험하고 있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을 내가 누리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충만한 만족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예수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말씀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그렇게 알아가야 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주님이 각각의 양들을 잘 안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4절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절)
우리 안에 있떤 양들을 모두 우리 밖으로 내보내면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내놓다’는 단어가 ‘밖으로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강제로 양들을 우리 밖으로 몰아냈다는 의미입니다.
목자가 우리의 문을 열고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가자고 할 때 순순히 말 잘 듣고 따라 나오는 양만 데리고 가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나오지 않는 양들은 두고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기 싫어하는 양도 지팡이로 툭툭 치면서 다 내보냈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싶었겠습니까?
우리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양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나오라고 불러도 나오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가서 몰아 데리고 나오려고 해도 도망 다니는 양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양들은 그냥 둔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강제로 우리 밖으로 나오게 했다는 의미가 바로 ‘내놓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아십니다.
그것도 친밀하게 잘 아십니다.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뭐를 좋아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키실 때가 있고 또 때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보내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원하지 않은 것들을 주님이 하게 하십니다.
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목자가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지? 밖에 나가기 싫은데.’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양 입장에서는 쉬고 싶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 우리 안에 있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자꾸만 나가라고 걷어차고 작대리고 치니까 귀찮고 싫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왜 그렇게 합니까?
양을 괴롭히는 게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양을 너무 잘 압니다.
이 양에게 뭐가 필요한지 뭘 해야 되는지 어디에 가야 되는지 뭘 먹어야 되는지 목자가 잘 압니다.
그런데 양들은 몰랐습니다.
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도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을 지키고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는 존재가 바로 양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한 능력도 있고 자기 방어도 있고 꾀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양은 그런 게 없습니다. 때문에 목자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안 되는 짐승이 바로 양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모르고 목자가 압니다.
그래서 목자가 알아서 우리를 잘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목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목자’라는 개념을 많은 성도들이 너무나도 낭만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친절하시고 온유하시고 관대하시고 사랑이시고 따뜻하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 삶을 항상 봄날처럼 화사하고 따뜻하고 싱그럽게 인도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목자가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때려서 잡아끌기도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양이 소리 지르고 반항해도 그렇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이미지 속 목자는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삶에 대한 기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뭔가 문제가 있고 잘못됐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나에 관하여 너무 자세히 알고 계시고 너무 잘 알고 계시고 또 인격으로 알고 계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면 어떤 곳으로 인도하십니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절)
이 말씀을 그대로 지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 이상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두 가지를 주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신 이후에 알아서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것을 주십니다. 생명이 충분하게 만족하는 것을 해주시려고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뜻입니다.
더 풍성하다는 것은 충분한 만족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것은 믿습니다.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도 믿습니다.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믿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영생이 있는 자와 영생이 없는 자의 삶은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영생이 없는 주변 사람들과 내 삶이 큰 차이가 있습니까?
밖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차이는 없습니다.
영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다른 점이 확연하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충만한 만족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충만한 만족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이것은 스스로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충만한 만족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충만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만족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충만한 만족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뭐지? 나에게는 충만한 만족을 주지 않으신 것일까?’
이렇게 의문은 가지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생명 주셨고 또 충만한 만족도 주셨나보다.’
신앙생활 할 때 이렇게 무작정 믿으면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나기 힘듭니다.
그냥 종교생활하다 끝나기 쉽습니다.
도저히 느낄 수 없어서 안 받았다고 여겨지면 질문해야 합니다.
“나에게 충만하게 주시지 않았으면서 충만하게 주셨다니 말이 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충만한 만족이 내가 생각하는 만족이 아닙니까?’
이러한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더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 어떻게 충만한 만족을 주시는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17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영원생명입니다.
그 영원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충만한 만족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목숨을 버리시기 위하여 다시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주님이 버리신 목숨을 다시 얻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사망이 끝났고,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만 집중하고 붙들면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생명의 문제는 우리에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사망을 해결하는 것이지 생명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결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도 믿어야 하지만 주님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십자가는 계속 강조되지만 부활신앙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진리가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출발이고 시작이니까 십자가를 많이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도 동시에 강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는 다 해결됐습니다.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생명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죄와 사망이 없는 것만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생명은 덜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에 대한 이해가 약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구원은 받았는데 천국 백성의 삶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
구원이란 어디에서 건져진 것 아닙니까?
사망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확신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약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지만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내 삶은 계속 강력해지고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에게 죄와 사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더 강력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생명을 다시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우리를 다시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부활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다시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시 주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도무지 듣지 않는 자식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속만 썩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일인지 철이 들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서 부모님 말씀에 ‘예’하고 순종한다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온 것 아닙니까?
이것이 다시 얻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주님이 보살펴주신다, 주님이 책임져주신다. 주님이 지켜주신다, 주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다시 잘 살게 해 주시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그 차원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늘 우리는 거기에 머물기 때문에 신앙의 수준이 이런 것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주세요.’
‘내가 주님의 소유라면서요? 그러니까 입을 것 주세요.’
‘내가 주님의 소유라면서요? 그러니까 편하게 해주세요.’
거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딱 아이들처럼 기도합니다.
철이 덜 든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아이가 성장하고 성숙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님의 뜻과 생각을 아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되찾았다는 말씀은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손 안에 있다는 말씀보다 더 깊은 의미는 다시 그분의 통치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되찾은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 안에서, 부활의 생명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절에서 말씀하시는 ‘충분한 만족’이 어떤 뜻인지 좀 더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은 내가 먹고 싶은 것 다 주고, 입고 싶은 옷 다 사주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게 해주고, 갖고 싶은 것 다 주면 그것을 충만한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가기 싫어!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어.”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공부하기 싫어. 오늘 하루 종일 놀 거야.”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루 종일 핸드폰 게임 할 거야.”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충만한 만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면 불만입니다.
나는 학교 가기 싫은데 부모가 억지로 깨워서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양치시키고 세수시킵니다. 식탁에 앉으라고 하고 먹기 싫은 밥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옷 입혀서 가방 들려서 차에 태워서 학교까지 데리고 갑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불만스럽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가 충만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까?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충분히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게 좋은 것과 주님이 생각하는 나에게 좋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4절에 ‘내놓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억지로 가기 싫은데 보내십니다.
억지로 하기 싫은데 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절)
주님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절)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절)
이 때 ‘계명’의 원어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은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버렸는데 명령이라고 말씀합니다.
명령을 받아 순종해서 버렸다면 그것은 스스로 버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명령’을 계명으로 번역한 것은 잘 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다른 말로 하면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사명에 억지로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쁨으로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억지로 지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 짊어졌던 십자가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재미있어 보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졌습니까?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형틀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삶은 죄가 하나도 없는데,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형틀을 짊어지는 일이 그 인생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구레네 시몬이 너무 억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이것을 짊어져야 합니까?”
그렇게 목숨 내놓고 로마군인에게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론 구레네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 순간 로마 군사가 너무 무서우니까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대들었다가는 그 자리에 끝날 것 같으니까.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는 육신적인 고생은 정말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게다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창피하고 모욕적이었겠습니까?
죄가 하나도 없는데 누가 나한테 죄인 취급하면 얼마나 모욕적이고 수치스럽고 창피합니까?
그때는 구레네 시몬이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졌을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도 무거웠겠지만 죄인의 형틀이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바로 그런 십자가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평생 억지로 지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를 때는 억지로 집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어떻습니까?
구레네 시몬도 나중에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보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마지못해 합니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힘들고 고달프고 때로는 그것이 모욕이고 수치고 자존심도 상하지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제일 잘 아는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저주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그날 그곳에서 그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그의 인생에서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그때는 그렇게 저주 같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복이었다.”
이것이 구레네 시몬의 영성입니다.
그것이 ‘나를 억지로 강제로 내놓으시면 그리스도의 사랑’(4절)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진리 안에서 성장하게 되면 10절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충분한 만족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신앙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영적 유아 상태에 머물러서 아이들처럼 먹을 것 달라고 하고 놀 것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 주시지 않으면 불만하면서 마치 아이들처럼 엄마 밉다고 하고 아빠 밉다고 하고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봐.”
“나는 친자식이 아닐지도 몰라.”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참 목자이신 주님을 반드시 만나고 경험하고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때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가 불편하고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일지라도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깨우쳐 주셔서 그것이 생명이며 충만한 만족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고백하고 인정하고 찬송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지는 십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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