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1-16
요한복음에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보여주는 일곱 표적이 나옵니다.
본문은 그 중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마지막 표적입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었던 나사로가 다 죽게 되자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런데 이 때 ‘사랑’은 ‘필레오’(φιλέω)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예수님의 본래의 사랑은 필레오가 아니라 다른 단어 ‘아가파오’(ἀγαπάω)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나사로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누이들은 예수님이 자기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아가파오라고 부르지 않고 필레오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는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보다 덜 사랑하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느꼈기 때문일까요?
이렇게 생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도 예수님이 그들 남매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동생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왜 요단 저편으로 가셨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 있던 베다니의 집은 굉장히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기 집처럼 편하게 머무셨던 유일한 집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다른 곳도 그런 장소가 있었을 수 있으나 예수님이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쉬셨던 곳으로 성경에 기록된 곳은 나사로의 집이 유일한 듯 합니다.
대접을 극진하게 받는다고 해서 그 곳이 편합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한 상 잘 차려놓고 대접도 잘한다 할지라도 사람이 편하지 않으면 한두 번은 갈 수 있지만 자주 내 집처럼 가기는 힘듭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이 바로 예수님에게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집도 넓고 방도 많고 먹을 것도 잘 대접해줘서 예수님이 그 곳에 자주 가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을 굉장히 편안하게 생각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정말 아가파오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빨리 오시라고 전갈을 보낼 때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겠나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목숨을 걸고서라도 빨리 오세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요단으로 건너가셨습니까?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7, 8절)
만류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유대로 가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몰랐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왜 요단 저편으로 가셨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 곳으로 피신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물론이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 소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위험한 상태입니다.
다시 자기 집으로, 유대로 돌아오시게 되면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체포되거나 돌에 맞아 죽을 위험한 상황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라비 나사로가 곧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예수님이 꼭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만 오신다면 오라비 나사로가 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 위험한 일을 당할 것이 예상됩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와달라고 요청하면 강력한 요구가 담기는 것 같으니까 필레오 사랑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가페는 목숨을 던져서 하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바쳐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고 그분이 속히 오셔서 오라버니를 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오라버니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너무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 죽으나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나사로의 누이들의 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전갈 안에 그 믿음과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솔직히 육신적으로 뭐가 더 급합니까?
나사로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예수님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던진 돌을 맞는다 하더라도 곧 회복될 수도 있는 분입니다. 병든 사람들 다 고쳐주고 눈 먼 사람들의 눈도 뜨게 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 예수님이 돌을 맞는다 하더라도 고칠 수 있는 분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어로 예수님께 빨리 와달라고 얼마든지 재촉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위험해도 와 달라고, 설사 돌에 맞는 일이 있더라도 빨리 와달라고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하여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곧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
죽을 병이 아니었습니까?
죽을 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원문 그대로 지역하면 이렇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다.”
죽을 병인데 죽음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죽는데 죽음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굉장히 심오한 말씀 아닙니까?
분명히 죽을 병이고 분명히 죽었는데 그 사건은 죽음을 향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는 것
사실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과 진실이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죽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실은 죽음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죽음의 현상과 증상이 보일지라도 본질은 죽음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절)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립니다.
나사로가 죽으면 가시려고 계획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시면 나사로가 죽기 전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그 때 나사로를 일으키면 죽은 자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일으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전에 하셨던 기적들과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사로가 죽어야 되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 죽은 자를 일으키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표적 안에는 단순히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예수님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활을 이 표적 안에 예표로 삼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희에게 기쁨이다.”
“내가 그곳에 없는 것이 너희의 기쁨이다.”
그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살기를 바랍니다.
나사로도 살기를 바랄 것이고 마르다와 마리아 역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여기에서 회복하고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가 망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나사로는 죽지 말아야 합니다.
나사로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나사로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나사로의 병이 거기에서 멈추고 더 진행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나사로가 더 진행되어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틀 동안 더 머물면서 나사로가 죽기를 예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사로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이후 세 남매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정적인 사건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건입니다.
‘진짜 예수를 죽여야겠다.’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먹습니다.
때문에 이 일로 인하여 나사로나 마르다, 마리아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학자들이 해석합니다.
왜 요한복음 12장 이후 이 세 남매가 등장하지 않는가?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인데 왜 12장 이후에 등장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계속 연구하면서 이런 저런 결론을 내립니다.
위험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닐까?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의 표적이 되면서 그들까지 표적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신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시기 몇 개월 전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말씀이 있어야 정황상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하고 이렇게 친한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위험해진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부활한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위험해진 것입니다.
때문에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일이 나사로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죽는 것보다는 위험하더라도 어디 숨어서라도 사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위험한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때문에 이 사건 역시 예수님을 위한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그분이 부활하실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부활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예수님의 계획과 의도가 있었겠지만 이것 모두 주님에게만 좋은 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계속 흐르고 것이 바로 주님에게 좋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때로는 주님에게 좋은 것이 우리들에게는 덜 좋은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좋은 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다시 생명을 얻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위험에 빠뜨려서 숨어 사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원히 사는 것이 비하면 뭐 큰일이겠습니까?
현실적으로는 예수님에게만 좋고 영광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처럼 탄탄대로를 달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 주께 이로운 삶은, 예수님께 더 좋은 삶은 때로는 나에게 불편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에게 불편한 삶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을 위해서 수고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손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내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사랑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떤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저는 예수님 너무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정말 잘해주셔야 됩니다.’
이렇다면 사랑입니까?
‘예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좋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나는 불편해도 도됩니다. 어려워져도 됩니다. 손해를 봐도 됩니다. 억울해도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교회를 위해서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래도 됩니다.’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그게 아가페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셔가지고 뭐라고 물어보십니까?
처음은 아가페로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냐?”
이 때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 물음에 베드로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질문을 바꾸십니다.
“그럼 네가 나를 필레오로 사랑하니?”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번역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단어로 물어보십니다.
“아가페로 사랑하니?”
이 물음에 베드로가 대답하지 못하니까 다시 물으십니다.
“필레오로 사랑하니?”
역시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아가페로 사랑한다고 대답하겠습니까? 자기가 한 짓이 있는데.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보면 베드로는 참 정직합니다.
“나는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필레오로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 내가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저는 필레오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정말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예수님이 이제는 베드로를 두 팔 벌려 띠 띠우고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사랑에 묶여서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한테 잘할 수 있고 주님한테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정확히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선택하고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만을 위해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가 주의 사랑에 묶여서 가는 것입니다.
묶여서 가는 사랑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주 앞에 헌신할 수 없고 주 앞에 내 삶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내게 좋은 삶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 가장 잘 사는 것이고 가장 좋은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주의 사랑으로 묶어서 데리고 가세요.”
그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던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이었던 순간인 것처럼우리 또한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억지로 뭔가를 합니다.
교회든 집이든 직장이든 정말 좋아서 신나게 하는 일이 우리 인생 안에 얼마나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나쁘게 표현하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이것을 곰곰 묵상해 보면 그게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 내가 주님을 더 찾을 수 있고 내가 주님을 더 부를 수 있고 내가 더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결코 주님을 선택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은혜이고 오늘 내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또 주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게 하신 것이 그게 은혜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면 우리는 분명히 육신을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주의 사랑에 매여있습니다.
직분에 매여 있고 직책에 매여있고 다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은 번거롭고 또 지금은 또 힘들고 또 지금은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주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 은혜의 진리 안에 우리가 더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5절)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거기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정확히 어떤 분인지를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못 알아듣습니다.
“나사로가 지금 자고 있어”
이렇게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자고 있으면 곧 일어나겠네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나사로 죽었다니까. 나사로가 죽었어. 그래서 내가 가야 해.”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이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는다면, 예수님을 알고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 또한 나사로처럼 죽음의 두려움과 어둠의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의 이 고통과 나의 이 어려움과 나의 이 아픔은 누구를 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기까지 가고 그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고난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의 고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이 가치있고 귀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당하는 고난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되는가?
내가 이렇게 당하는 어려움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되는가?
내가 이렇게 겪는 아픔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되는가?
내가 이렇게 겪는 시련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되는가?
우리가 지난날 겪었던 그 많은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과 시련들이 그 고통들이 그냥 사라지고 끝나고 내 인생 안에서 무익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약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아픔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슬픔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만이 아니라 내 인생 모든 것을 누군가의 약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인생이 잘 사는 인생입니다.
내게는 쓴 것이지만 누군가를 고치고 회복하고 일으키고 세워주는 귀한 약재료로 쓰임받는 우리 인생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눈을 더 열어주셔서 우리의 죽을 병들이 죽음을 향하여 잊지 않은 것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결국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음 안에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힘들고 아픈 삶이 누군가의 약재료가 되는 고난인 줄 믿게 하시고 또 그렇게 삼을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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