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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천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씀(요한복음 13:21-30)

천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씀 설교동영상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 점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유다가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을까?’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그 곁에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런 가룟 유다가 이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 때부터 유다가 흔들리고 사탄의 유혹과 꾐에 넘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사탄의 통치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완전히 사탄에 붙잡힌 상태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런데 본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한 조각

이 단에가 세 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6, 27)

한 조각이 단어를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있지만 성경에서 같은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 것은 분명히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즉 굉장히 중요한 단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이 조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실 때 이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큰 떡 한 덩어리에서 떼어서 주면 그것도 조각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그런 의미로 쓸 때에는 다른 단어인 프소미온’(ψωμίο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3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때 은 다른 단어 알토스(ἄρτος))입니다. 알토스는 한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 그 떡을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 떼다라는 단어는 부스러뜨리다라는 단어이지 조각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때 부스러뜨렸다는 단어는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몸이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부스러뜨려서 그 몸을 우리가 먹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 주신 것은 단지 한 조각입니다. 원래 원문에는 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런데 번역할 때 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입니다. 아닙니다. 단지 한 조각을 주셨고 그 한 조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조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각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에서는 어디에서 쓰였는가 하면 (똑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같은 단어 안에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7)

이 때 부스러기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가룟 유다가 받아서 먹은 것은 우리가 받아먹는 떡이신 생명의 말씀은 온전한 한 덩어리에서 알토스로 먹어야 하는데 그것을 한 조각만 먹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을 읽을 때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그 구절을 이해하고 생명의 말씀으로 먹어야 하는데 성경 전체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따로 한 조각으로 말씀을 먹으면 우리 인생 가운데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삶이 우리 인생 안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26)

그냥 조각채로 주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뭔가를 적셨습니다.

빵집에서 바게트 같은 빵을 하나 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빵들은 빵만 먹으면 맛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잼이든 올리브오일이든 뭔가를 찍어서 먹지 않습니까? 뭔가를 찍어서 먹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말씀을 조각으로 읽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단어 하나만 가지고 엉뚱하게 설교하거나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단어가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반드시 봐야 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여러 맥락 안에서 다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성경 전체의 맥락과 흐름과 진리 안에서 말씀을 이해해서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단어 하나를 자기 나름대로 정의해서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말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왜 말 때문에 오해합니까?

그 사람이 쓰는 단어 하나에 집중할 때 말씀이 완전히 왜곡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스나 유투브 같은 것을 보면 누군가의 말인데 앞뒤 전후 맥락 없이 탁 잘라서 자기 편한대로 기사를 실거나 영상을 만드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기자들이 저를 인터뷰한다고 하면 저는 대부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제가 했던 많은 말들 가운데 자기의 목적 아래 의도를 가지고 말을 자르고 붙여서 방송을 내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자는 내 진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의도를 가지고 답과 방향을 정해서 목사인 저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무개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팩트인 것처럼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각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단어를 쓰는데 그 단어를 밑도 끝도 없이 다른 사람한테 옮겨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말 전체를 듣지 않은 사람은 한 단어만 전해 듣고 그렇게 말했다고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조각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어의 정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때문에 상대방이 가진 단어의 정으로 그 말을 이해해야 하고 또 전체의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썼는지를 유심히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하는 말은 앞뒤 다 잘라버리고 전체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내가 싫어하는 말 내게 민감한 말이라고 하여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민감한 단어가 있습니다. 각자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했다고 하여 기분 나빠합니까?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가 하는 짓입니다.

그런 습관들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반영이 됩니다.

즉 설교자가 전체 설교 가운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가를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자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전하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설교를 하나하나 잘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시간 내내 다른 생각 하거나 졸다가 어떤 단어 하나가 딱 꽂혔는데 하필이면 기분 나쁜 단어입니다. 그러면 기분 나쁜 설교가 됩니다. 반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기분 좋은 단어라면 전후 맥락은 전혀 상관 없이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가 하는 짓입니다.

 

또 하나는 적셔 먹는 것입니다.

떡을 그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조미합니다. 가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어떤 것도 조미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말처럼 단단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그 단단한 떡을 아직 먹을 수 없고 씹을 수 없고 넘길 수 없고 소화시킬 수 없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부드럽게 하여 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씀을 맛이 없어 하니까 맛있게 하려고 거기에다가 잼도 바르고 버터도 바르고 설탕도 친다면 그것이 떡을 적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온전하게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사람의 교훈도 들어가고 세상의 철학도 들어가고 그 시대의 사상도 들어가고 시대의 뉴스도 들어가고 자기의 목적도 들어가서 읽혀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가미된 말씀!

이처럼 말씀을 조각 즉 파편으로 받거나 뭔가가 가미되어 조미료가 쳐진 말씀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 때 굉장히 무서운 말씀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조각을 받았을 때 사탄이 가룟 유다를 완전히 통치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말씀으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게 진짜 무서운 것입니다.

근데 그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조각의 말씀!

전체 맥락과 상관없는 말씀!

가미된 말씀!

조미료가 처진 조미된 말씀!

그런데 그런 것을 누가 사탄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그 말씀을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명백하고 순수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이 조각입니다. 알토스가 아니라 프소미온 즉 조각입니다.

게다가 조미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왜곡된 말씀 아닙니까?

그렇게 왜곡된 말씀이 우리 안에서 믿음이 되고 확신이 되면 그것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신념, 잘못된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왜 이런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믿음이 두렵습니까? 그 때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사실 다른 제자들도 이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만 보더라도 그들도 잘못 알아듣습니다. 사도 요한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모호합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베드로 있었으니까 아마도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잡아서 죽이려고 칼 들고 설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제대로 알아듣고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모르는 행동을 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27-29)

네가 계획한대로 네 일을 하라고 했고 그가 나가자 돈궤를 맡은 자이니 명절에 쓸 물건을 사러 가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제자들 모두 말씀을 온전하게 듣지 못하고 조각으로 듣기도 하고 자기 생각과 욕심을 을 넣어서 듣기도 했으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는 굉장히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도둑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이 하셨던 모든 말씀들을 굉장히 강한 욕망과 욕심으로 들었습니다. 때문에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말씀을 받을 때 우리 안에 욕심과 욕망 같은 것들이 최대한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내 마음, 내 생각, 내 뜻, 내 의지, 내 욕심, 내 욕망을 다 내려놓고 말씀을 온전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과 훈련과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을 제일 잘 읽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4:12)
그렇습니다.

말씀이 나를 완전히 해체해버려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조각내고 조미를 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해체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내 시선으로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시선으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말씀의 안경을 가지고 나를 보게 되면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의 시선에서 그 말씀이 나를 보셔야 합니다. 말씀의 눈으로 내 자신을 보게 될 때 말씀이 나를 다 해체해버립니다. 그래서 내 마음 저 관절과 골수 안에 있는 내 생각까지 말씀이 다 들춰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어떤 변명도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 노력을 할 때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안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재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룟 유다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믿음과 신념은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탄의 통치를 받게 된다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가룟 유다를 만날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나는 가룟 유다가 아닌 것이 참 다행이다.’
즉 가룟 유다는 역사적으로 한 명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나는 가룟 유다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안심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역사에는 가룟 유다가 한 명이 아니라 무수한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까?

조각으로 말씀을 받거나, 말씀에 뭔가 첨가물을 섞어서 받는다면 얼마든지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으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특별히 저 같은 설교자들은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그대로 받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는 빵은 별 맛이 없지 않습니까?

처음 바게트 빵을 먹을 때에는 얼마나 질기고 밋밋한지 영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빵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계속 씹고 계속 먹으면 참 맛이 있습니다.

말씀이 그렇습니다.

들을수록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읽고 싶지 않은 말씀이 있는가 하면 반면 들으면 들을수록 더 깊어지고 더 좋아지고 더 은혜가 되는 말씀이 존재합니다. 한 번 들을 때보다 두 번 듣고 세 번 듣고 네 번 듣고 다섯 번 들을수록 계속 확장되고 성장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짜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확장되고 성장합니다.

마치 조미료가 첨가된 음식은 첫입에는 입에 감기고 맛이 있지만 계속 먹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순수한 천연 재료들을 많이 음식들은 처음에는 별로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몸에 좋다고 하니까 먹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먹으면 먹을수록 그 깊은 맛이 느껴지면서 더 먹고 싶어집니다.

말씀도 원래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랍게도 말씀이 더 달고 맛있고 맛있어 계속 더 읽고 싶어집니다. 통독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말씀을 조각으로 이해하거나 조미료가 첨가된 말씀으로 읽는다면 읽을수록 물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온전한 하나의 말씀(알토스)로 첨가되지 않는, 조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과 누룩을 넣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물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 설탕하고 아니 누룩입니다.

맛있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드시는 말씀, 하나님이 드시는 음식은 뭔가 조미가 되면 안 됩니다. 부풀려서도 안 됩니다. 순수하게 오직 기름과 포도주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 앞에 우리의 욕심도 우리의 욕망도 우리의 목적도 우리의 생각도 없이 말씀을 말씀으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완전히 비추어주고 그 말씀이 나를 해체시켜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내 욕망들을 다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인격으로 만남으로 말씀에 사로잡힌 자 성경에 사로잡힌 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생명의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 매 순간마다 말씀을 조각으로 받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에 뭔가 첨가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이 나를 해체하실 수 있도록, 나를 온전히 주 앞에 인격으로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 온전한 말씀이 나를 치유하며 나를 고치며 나를 회복하며 나를 인도하며 나를 성장시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