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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오늘도 나의 하늘은 밝음(요한복음 12:37-50)

오늘도 나의 하늘은 밝음 설교동영상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37-50

 

 

예수님께서 굉장히 많은 표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할 것은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고 요한복음은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서 예배드리던 중 천상 회의가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되고 하나님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를 위하여 누구를 보닐꼬?’라고 물을 때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때 이사야를 파송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보내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네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깨우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을 막고 귀를 막아서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다.”

요한은 영적으로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단지 그 시대에 회개하고 돌이켜 심판을 면하게 하려고 이사야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여 심판을 받도록 이사야를 보낸 것이라는 그 말씀이 당시 그 시대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실 텐데 그 구원자이신 예수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하시고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을 보고도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얻으려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사람들이 알아야 되는데 오히려 그것을 모르게 하셨다니,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고 예수님이 내 앞에 오셔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자라는 것입니다.

한번 이렇게 적용을 한번 해보세요.
누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겠죠?”

제가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안 보이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안 보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일하시는지 못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고 마음 고생을 합니다. 안 보이니까.

지금 내가 당한 이 어려움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들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좋은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다.

성경이 수없이 많이 말씀하시고 또 수없이 많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도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알고 있지만 못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동행에 관한 설교를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사실은 안 보이고 안 들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두운 자이고 무지한 자들입니다.

모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은총 아닙니까?

그런 우리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이, 그분이 우리의 구원이심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이, 그분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셨음이, 그분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음이, 그분이 승천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음이 믿어집니다.

내 개인적인 일들, 이 사소한 일들 가운데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잘 안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우주적 사건은 믿어집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사건, 부활과 승천의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반면 내 개인의 일상은 아주 사소한 사건 아닙니까?

내가 아픈 일, 힘든 일, 걱정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내가 걱정하든 내가 고통 받든 세상 누구도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는 글자 그대로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내게 일어난 일들도 아무 것도 아닌 지극히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이, 나를 도와주심이, 나를 인도하심이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엄청난 우주적 사건은 믿어집니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말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정된 것이냐 아니면 예정된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을 너무 교리적으로 집중하여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두 교리 모두 결론은, 우리가 그러한 은총을 얻었다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방점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예정인가 아닌가 이것으로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어떤 요리든 방점은 우리가 받은 은혜, 은총이신 하나님께 둬야 합니다.

교리적인 논쟁에 방점을 두는 것은 내게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때문에 이 말씀도 같은 시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내가 원래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무지한 자로구나. 그렇게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나인데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지?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지? 말할 수 없는 은총이로구나.’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이사야를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을 깨우치고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이사야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야말로 평생 감사하고 평생 기뻐하고 평생 찬송하고도 남을 만한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무수한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관리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

많은 관리들이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출교 당할까 두려워 예수님을 믿었음을, 예수의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출교는 회당에서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유대인 10명이 살면 그곳에는 반드시 회당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회당 공동체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 이민을 많이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가 한인 사회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모여서 이민생활의 어려움도 토로하고 때로는 서로 정보를 얻기도 하고 또 도와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민사회에서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되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어디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정보도 얻을 수 없게 되다 보니 살기가 어려운 거예요.
외국인들과 대화도 안 통하고 설령 말이 통한다 할지라도 관심조차 없는 그들이 도와줄 것도 아니다 보니 한인사회에서 추방되어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보다 더 심한 것이 유대 회당 공동체였습니다.

유대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사회적 사형 선고였습니다.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때문에 출교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드러내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였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끊는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이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는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소외될까봐 무서워서 예수 믿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교회 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
이 말씀에서 사랑관계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바꿔 읽어도 됩니다.

그렇게 읽어야 우리가 이해하고 적용하기 쉬운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사람과의 관계는 무시해도 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관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점 맞춰져야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부모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가족들과 의절하라는 말씀일까요?

가족들과 의절하는 것이 좋은 믿음처럼 드릴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족을 사랑할 때 그것이 가족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이 한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너무 감사하여 그의 인생의 2년 정도를 선교지에 가서 헌신하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약속하고 간 곳이 몽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분이 간 곳이 굉장히 추운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추운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추위를 피해서 잠시 다녀오는 곳이 시베리아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베리아가 세상에서 제일 추운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몽골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땔감조차 없어 그렇게 추위에 벌벌 떨면서 고생을 하더랍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비록 허름하고 허술한 집이지만 그나마 난방은 되니까 괜찮았는데 그 교회 교인들은 극동의 추운 날씨에서 땔감이 없어서 고생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기도제목을 안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절대 그들의 삶에 간섭하지 마라.”

섣불리 그들의 삶 도와주지 마라.”

자꾸만 이런 감동을 주시더랍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땔감이 없어서 그 추위에 벌벌 떨면서 고생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들에게 땔감이라도 구해주라고 하실 것 같고, 땔감 사는 데 보태라고 돈이라도 주라고 하실 것 같고, 하다못해 집에 있는 기름이라도 빼서 나눠주라고 하실 분 아닙니까?

너만 따뜻하게 지내는 게 말이 되냐?”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계속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순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몽골에서 지내시고 몇 년 전에 미국에서 강사로 초청을 받아가지고 연합집회에 강의를 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그때 몽골에서 만났던 청년들이 미국에 유학을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몽골 교회 청년들의 근황을 들어보니 어떤 사람은 한국에 와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미국에서 박사 과정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들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땔감이 없어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들이 한국과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한다니 기적 아닙니까? 그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때 나에게 저들의 가난한 삶에 개입하지 말아라!’

그 이유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용규 선교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가는 삶을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여 그들도 너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을 살게 하라는 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

만일 이용규 선교사님이 그들에게 땔감을 구해주고 옷 구해주고 식량 구해주면서 도움을 줬다면 그들은 누구를 바라봤겠습니까? 선교사를 바라봤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선교사만 쳐다봤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선교사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돈 떨어지면 선교사한테 부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하나님 찾지 않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선교사님도 후원을 받아서 선교를 간 것이 아니라 아무런 대책 없이 갔다고 합니다. 8년 동안 미국에서 자기와 가족들을 먹여 살린 하나님께서 몽골에서 2년 정도를 못 먹이시겠는가 하는 믿음으로 선교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 선교사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받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 이 선교사님의 삶을 몽골의 청년들이 보고 그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니까 땔감조차 없어 극동의 추위에서 떨고 있던 형편의 사람들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유학을 와서 학위를 받는 엄청난 인생의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관계보다 하나님과 관계가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관계가 시작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내가 온전한 관계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관계가 더 온전해지고 그들을 진정으로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사회적 관계든 가족관계이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의 출발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람을 빛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빛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빛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때 그 빛은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 때문에 밝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말씀을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비추어주는 찬란한 빛이 되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밝음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어렵고 똑같이 고통스러운데 너희들은 절망이지만 나는 소망이라는 것, 너희들은 슬픔인데 나는 기쁨이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저 사람은 왜 밝을까?’
형편도 나와 별로 다르지 않고, 똑같은 환경을 살아갔는데 저 사람은 왜 밝을까?’

그 밝음의 이유와 원인이 무엇입니까?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빛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빛이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밝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사람들이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람이지 내가 빛 노릇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경을 보면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몇 개를 살펴보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18:28)

무지에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무지함이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날 때 깨달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무지가 깨달아지는 것!

나를 깨닫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20)

악에 빛이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죄인인 것을, 내가 악인인 것을, 내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죄인임을 전혀 몰랐습니다.

내가 무슨 죄인이야? 나처럼 정직하고 나처럼 의롭게 산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런 자였는데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시니까 내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18:11)

숨는 것 가운데 빛이 비춰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 가운데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어둠에서 나오게 하고, 은밀한 곳에서 나오게 하고, 그 구석에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두렵고 어디 가는 것도 두렵고 다 두렵습니다. 뭔가를 시작하는 것도 두렵고 다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시니까 비로소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일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12:25)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캄캄합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우리의 눈이 열려서 소망이 보이고 그리스도가 보이고 생명이 보이고 구원이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35:6)

심판의 빛이 임합니다.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나,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리스도의 빛이 나를 비춰주셔서 그 심판에서 나를 건져주시므로 우리에게는 이제는 정죄의 심판은 없고 상급심판밖에 없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제 나는 상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짜 친한 것입니다.

섣불리 내가 개입하고 내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하여 돕는 것이 나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하여 배고픈 자 먹이고 목마른 자 마시게 하고 갇힌 자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병든 자 치료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 찾아가서 그 사람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밥도 먹여주고 보살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로 인하여 내가 만난 빛이신 그리스도를 그에게 소개해주는 것입니다.

그도 나의 도움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도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도움을 절제하는데 그 또한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하도록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교리와 종교는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줘야 된다고 말합니다.

묻지도 따지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도와줘야 선이라고 말합니다.

선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선입니다.

선은 본질적으로 방법과 형태는 다양합니다.
땔감을 구해주는 것이 선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땔감을 안 구해주는 것이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은 그 일을 통하여 땔감을 구해주든 구해주지 않든 그 일을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빛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예배 안에서 더 선명하게, 더 뜨겁게, 더 실제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런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다시 새 힘을 얻고 소생하여 승리하는 한 주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에 빛이신 그리스도가 더 필요합니다. 주님도 찾아와 주셔서 빛으로 비춰주시고 우리의 어둠도 우리의 두려움도 우리의 보지 못함도 우리의 모든 슬픔도 그 빛으로 깨어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