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한복음 12:20-36
예수님을 헬라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헬라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헬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헬라 사람들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방언(외국어)으로 설교를 했고 그 설교를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베드로뿐만 아니라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각기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헬라 지역에 살면서 개종한 유대교로 개종한 많은 헬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요한복음 12장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어디를 향하여 걷고 있으십니까?
죽음을 향하여 걷고 계십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만 없으면, 예수님만 없애버리면 예수님만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전하는 모든 말씀들을 다시 들을 필요가 없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라다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분명히 알면서 십자가 즉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계실 이 때 무엇이 준비되고 있습니까? 이방 선교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눈에 보이는 사실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은 이방 선교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명이 더욱 확산되고 확장되고 또 생명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2장을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산에서 이삭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황급히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네가 나를 진실로 경외하는 줄 이제야 확인했다고 하십니다.
아셨지만 확인이 안 되었는데 이제야 확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은 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창 22:20-23)
이삭의 부인이 리브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 사건을 말씀하시는 본문 안에 누가 준비되고 있습니까?
리브가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시고 한편으로 리브가를 준비하고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4, 25절)
이 말씀이 잘 적용되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린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녀가 우리의 자신인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은 동떨어진 두 개의 인격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고 이삭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번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만일 자기가 죽는 것이 싫어서 그 말씀을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많은 후손이 이삭을 통하여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미워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많은 생명이 나올 수 있도록 또 다른 한편에서 리브가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리브가가 이삭의 것이 될 것인가 되지 못할 것인가는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죽음의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사단이 보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는 예수님을 많은 헬라 사람들이 찾아와서 만나고 있으니 사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곧 죽을 사람 뭐 하러 찾아와?’
‘곧 끝날 터인데 뭐 하러 만나러 와?’
‘곧 없어질 사람인데 뭐가 궁금해? 들어봐야 무슨 소용이야?’
사탄은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예수당이 그렇게 급속하게 확산하고 유대 땅을 넘어서 온 세계로 번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영입니다.
우리의 경영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25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고 할 때 ‘생명’이라고 쓴 단어는 목숨 생명인 육체를 뜻합니다.
‘육체를 사랑하는 자 즉 육체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육체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육체를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최우선순위가 육체라는 것입니다. 내 육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 육체를 기준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건 속에서 자기의 육체를 미워하는 자는 무엇을 얻습니까?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날마다 선택의 순간에 있게 되지 않습니까? 매순간 선택합니다.
‘오늘 점심을 뭐 먹지?’
‘오늘 새벽예배 갈까 아니면 더 잘까?’
‘차를 타고 갈까 지하철을 타고 갈까 아니면 걸어갈까?’
‘커피를 마실까 주스를 마실까?’
이렇게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점심을 뭐 먹을까, 차를 뭐 마실까, 뭘 타고 갈까 이런 결정들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렇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됩니다.
이거 먹어도 되고 저거 먹어도 되고 또 안 먹어도 됩니다.
걸어가든 차를 타고 가든 그 결정이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은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런 선택은 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은 신중하게 잘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는 결정을 할 때 항상 나의 육체에 무엇이 더 유리한가를 염두에 둡니다.
내 영혼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내 육신에 더 유리한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을 위한 선택, 육신을 위하여 어떤 게 더 좋은가를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육체만을 위한 선택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다!
육체를 위한 선택은 어느 것이 육체에 조금 더 유리하거나 불리한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은 다 해로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육신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영생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삶!
어떤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까?
시간 아껴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선택들이 다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으니 영원한 삶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 아닙니까?
그런데 이 땅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이 땅에서 끝나 하나님 나라에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선택의 연속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선택이 육체가 아니라, 목숨이 아니라 나의 영혼과 나의 믿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를 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오해 소지가 많아 에둘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전부가 선택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선택하든 기준은 내 믿음을 위한 선택, 내 영혼에게 유리한 선택, 내 영혼에게 이로운 선택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을 위한 선택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항상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경건을 통해서 영적인 능력들을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믿음의 선택을 하기 어렵습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5, 36절)
여기서 빛은 예수님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본문의 맥락 안에서 이해한다면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 앞에 내가 있지? 너희들이 지금 나를 만나고 있을 때, 나를 만날 때, 나를 볼 때 나를 믿어. 지금이 너희의 인생에서 낮이야. 그런데 이 시간이 지나면 너희 인생 안에 곧 어둠이 찾아올거야. 그때는 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 믿을 수 있을 때, 나 만날 때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우리에게도 믿음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교회에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든지 교회 올 수 있습니다. 누가 교회에 가지 말라고 막지도 않습니다. 교회 앞에서 사람들을 선별하여 들어올 수 있는 사람과 들어오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교회에 가면 될 정도로 교회가 많습니다. 언제든지 어디라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 가면 되지.’
즉 사람들은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교회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의 밑바탕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고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믿음을 취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그 때 내가 취할 수 있었던 그 믿음을 다시 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좀더 설명해드리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하나가 아닙니다.
믿음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오늘 내가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믿음의 상자 안에 믿음을 하나씩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 채워진 믿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채워야 할 믿음의 조각들이 때마다 일마다 있습니다. 즉 오늘도 내가 취해야 할 믿음의 조각을 집어서 내 믿음의 상자에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믿음을 넣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은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지나가 버리니까 오늘 내가 집어넣어야 될 믿음은 없게 됩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중요한 시험을 봐야 하면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까? 시험 범위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하면 남은 날짜랑 계산하여 공부 계획을 세웁니다. 예를 들어 50페이지가 범위이고 날짜는 10일 정도 남았다면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시험 준비를 잘 해야겠다고 공부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하루에 5페이지만 본다면 한 번밖에 보지 못하게 되니까 하루에 25페이지씩 공부해서 적어도 네 번에서 다섯 번 반복해서 공부해야겠다고 시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공부해야 될 불량은 25페이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해야 겠다.’
그런데 내일은 내일의 분량이 있으니 공부해야 할 양이 2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더 힘들어집니다.
그런 것입니다.
보통 새해가 되면 성경 통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성경통독읽기표에 따라서 하루에 3장 혹은 5장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못 읽게 되는 날이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먹습니까?
‘내일 같이 읽어야겠다.’
그런데 내일 읽게 됩니까?
오늘 밀리면 내일도 밀립니다.
그러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중단됩니다.
한 달 두 달 정도 하다가 통독을 멈추었던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성경통독을 할 수 있을까요?
어쩌다 하루 못 했으면 어제는 잊고 오늘은 오늘 읽어야 할 것을 읽으면 됩니다.
어제 것까지 더 읽으려고 하다 보면 3장도 부담이었는데 6장이 되니까 부담이 두 배가 되어 점점 더 힘들게 됩니다.
하루 못 읽고 이틀 못 읽게 되면 3일치를 읽어야 합니다. 9장 혹은 10장을 읽어야 되니까 부담이 3배 아니 느 느낌은 3배 그 이상입니다. 그렇게 자꾸만 누적이 되다 보니 결국 덮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연말까지 계속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요?
어쩌다 못 읽었더라도 일단 오늘 읽어야 할 분량부터 읽으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건너뛰면 어떻게 됩니까?
이빨 하나 빠지게 됩니다.
믿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믿음도 오늘 내가 취해야 할 오늘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믿음을 내가 오늘 취하지 않으면 전체 믿음에서 하나가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빠진 것은 좀처럼 나중에 다시 끼워 채우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를 되돌아보십시오.
주변의 신앙 공동체들을 한번 보십시오.
인생에는 항상 믿음의 기회와 믿음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 기회를 다시 얻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잘 시켜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나중에 좋은 대학 가면 그때 교회 열심히 다니면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주일 예배도 드리지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설령 좋은 대학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그동안 신앙생활 못 한 것 다 만회하여 그 이상으로 잘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생 가운데 강력한 충격적인 사건이 없는 경우 또 신앙을 미룹니다. 대학을 입학했으면 신앙생활은 취업으로 미루게 됩니다.
‘좋은 데 취직하면 신앙생활 잘 해야지.’
원하는 곳에 취업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좋은 대학 보내주시고 좋은 직장 취업시켜주셨으니 더 늦기 전에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지.’
이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 놓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이끌어 가실 때 비로소 정신 차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하여 대학 다닐 때 해야 했던 신앙생활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취해야 할 믿음은 그때 취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취할 수 없습니다.
지금 취하는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내가 취해야 할 믿음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이 말씀을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취해야 될 오늘의 믿음이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 나는 오늘의 믿음을 취하여 나의 믿음의 상자 안에 넣어야겠다.’
그것을 놓치면 다시 취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지혜롭고 현명합니다.
만회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으로는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지나온 날들을 다 놓쳤다고 하여 낙심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이라도 내게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잘 취하면 됩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했다면 오늘도 내일도 놓치고 낭비하게 되었을 것 아닙니까?
때문에 이 말씀을 교훈 삼아서 빛이 있을 때 내게 믿음의 기회가 왔을 때 그 믿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물에 건져 올리는 세월을 아끼는, 세월을 낚아 올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을 아껴라’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세월을 낚아올려라’ 이 뜻입니다.
낚시하듯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잡아서 끌어올리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믿음을 낚시하는, 믿음을 건져 올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취해야 할 오늘의 믿음을 반드시 놓치지 않고 꽉 붙잡아서 내 믿음의 상자 안에 그 믿음을 채워 넣으리라.’
이런 마음으로 날마다 항상 믿음의 선택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생명을 위하여 선택하셔서 믿음을 취하여 날마다의 삶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살아있는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길에서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생명과 더 풍성한 확장을 예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기쁨으로 또 소망으로 사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매 선택의 순간마다 믿음의 선택들이 있게 하시고, 그 믿음의 선택들에 집중하고 마음을 쏟아 반드시 내가 얻을 믿음을 취하는 생명의 날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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