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1-8
마리아의 도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 때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니까 종려주일 전날 즉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있는 어느 한 집에 예수님께서 가셨습니다. 누구의 집인지는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초청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문둥병 시몬의 집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본문 말씀에 보면 나사로의 집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절)
나사로가 살고 있는 동네 베다니에 가셨다고 요한이 쓰고 있는데 뉘앙스는 나사로의 집에 가셨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이 누구입니까?
나사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이 있긴 합니다.
나사로의 아버지라고 하는 추정도 있고, 마르다의 남편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만약 문둥병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 있었던 사건이라면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이 회복된 것을 감사하여 예수님께 베푸는 잔치일 것이고, 나사로의 집이라면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예수님께 감사하여 베푸는 잔치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집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어쩌면 나사로의 집이면서 동시에 문둥병 시몬의 집이 같은 집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문둥병 시몬이 나사로의 아버지라면 한 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잔치에 예수님이 초청되셨습니다. 어쨌든 잔치가 있던 그 집에서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에게 붇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가지고 나온 향유가 엄청나게 비싼 향유였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나드 한근 즉 이 향유는 인도에서 수입한 향유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략 가격을 셈해보는데 300데나리온 정도의 값이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 엄청난 향유를 예수님께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조금 부은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쏟아 부었는지 본문의 요한복음은 발에 쏟아 부었다고 말씀하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은 향유가 흘러내려서 예수님의 발까지 적시게 될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굉장히 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엄청나게 많이 붓는 일이 벌어지니까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3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 1년 연봉 정도가 됩니다.
1년 연봉을 머리부터 흘러내려가지고 발끝까지 한순간에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까지 흘러내렸다면 그 향유가 발끝에서 끝났겠습니까?
땅바닥으로 모두 쏟아낼 정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가 발끝까지 적실 정도로 흘러내리니까 다급해진 마리아는 머리카락을 풀어서 발을 씻겨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여자에게서 상징적으로 가장 귀중한 것이 머리 아닙니까? 고대사회에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머리는 굉장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신체 부위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 사람의 몸에서 가장 하찮은 것, 가장 낮은 곳이 발 아닙니까?
마리아는 가장 고상한 신체 부위인 머리털로 예수님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하찮은 발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마리아는 향유를 쏟아 부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세례 요한의 고백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지도 못할 정도로 그분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이 연상이 됩니다.
마리아의 가장 고상한 신체 부위인 머리가 예수님에게 가장 하찮은 발끝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생각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였습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이 예수님의 가장 하찮은 것보다 못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생명인 피를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걸 받은 것입니까?
마리아는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한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좋아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너무 감사하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다.’
이것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자기가 간직해 놓았던 향유 옥합을 깨뜨려 거기에 부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이토록 비싼 향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자기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신부의 지참금이 필요하니까 그때를 위하여 나드를 조금씩 사서 모아놓았을 수 있습니다.
‘결혼할 때 이것을 팔아서 신부 지참금으로 가지고 가겠다.’
그렇게 준비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으로 예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다 부어드리는 것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비난했습니다.
“300데나리온 팔아서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이 때 가난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절대 빈곤자들입니다. 본문의 단어가 그렇습니다. 즉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오늘 당장 먹고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살림이 어려워서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죽을 수도 있는 절대 빈곤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 사람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가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감사하고 아무리 예수님이 좋고 또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사실 향유라는 것은 조금만 써도 그 향이 진동하지 않습니까? 누구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향수를 한 통 다 쏟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짝 뿌리는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작은 향수통이지만 몇 달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400g에 가까운 향유를 부었습니다.
엄쳥난 양 아닙니까?
너무 지나친 낭비라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한 마리아에 대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설명하십니까?
“놔두어라! 꾸짖지 마라. 마리아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그동안 이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절)
사실 마리아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준비한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 고맙고 감사해서 드린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마리아가 생각하여 드린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마리아도 나사로도 마르다도 모두 똑같이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주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들은 한 집에 살았으니까 항상 예수님을 동시에 만났습니다. 그렇게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마리아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성경의 사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남매에게 집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극진하게 대접하기 위하여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은 다가오는데 음식 준비는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조급하고 짜증도 난 나머지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말합니다.
“마리아 좀 보내주세요.”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눈에는 마리아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부엌에서 고생하고 누구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본문의 사건 전에 그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 말씀으로 예수님과 신령한 교통을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즉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긴 사람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잘 알고 누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누가 더 예수님한테 생각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을 드립니까?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온전하게 대접해 드리는 것일까요?
그분의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섬김을 제일 잘 받는 것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이 땅에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생명의 떡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명의 섬김을 잘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의 가치는 자기의 가장 고상한 것이 예수님의 가장 하찮은 발끝보다 못할 정도 너무 귀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로 예수님과 신령한 교제 안에서 예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종교색이 너무 강하게 되면 예수님을 섬겨야 되는 쪽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꾸만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섬김을 받지 못한 채 예수님을 계속 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마르다처럼 짜증이 납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마르다도 예수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항상 좋아했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면 아쉬운 마음에 더 있다 가시라고, 더 머물다 가시라고 붙잡으면서 배웅했습니다.
“또 오세요.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꼭 오셔서 편히 쉬세요. 제가 맛있는 음식도 준비해서 대접해드릴게요. 꼭 오세요.”
이것이 마르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섬김, 생며으이 섬김을 충분히 받지 못하니까 도리어 사랑과 감사로 시작된 그 섬김이 불평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종교색이 강하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종교성이 강하게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싫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좋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늘 감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이 너무 크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교회에 오고 싶고 항상 교회에 있고 싶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더 많이 사역하고 헌신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섬김을 받지 못한 채 그 일들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사역이나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 가운데 불편하게 됩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것 무엇보다 말씀의 섬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의 섬김을 받는 일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채워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 성경을 묵상하는 것, 설교를 듣는 것들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는 것이 노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경 써서 집중하여 들어야 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집중하지 않고 마음의 끈을 탁 놓게 되면 소리는 들리지만 그 내용은 들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때로는 설교를 듣는 것도 성경을 읽는 것도 노동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니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일로 하는 것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지금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다른 차원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깨닫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생명이 채워집니다.
그 생명이 채워짐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때 마리아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쏟아 붓는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내게 있는 작은 것들, 내게 있는 연약한 것들을 예수님을 위하여 사용할지라도 나는 비록 작은 것을 드렸지만 그 때 그것의 가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붓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여 향유를 붓는 것 이 둘의 가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작은 볼편 하나를 드릴지라도 생명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이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볼펜 하나의 가치가 아닙니다.
나는 그 가치를 모릅니다. 어느 날 주님 앞에 가서 앉았을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36)
그 때 묻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네가 나에게 섬겼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볼펜 한 자루밖에 드린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황송하다고 대답하는 일도 우리 인생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예수님께 볼펜 하나 드린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이 믿음의 차원 안에서는 상상 이상의 엄청난 것을 예수님에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의 섬김을 잘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리아에게 그런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온전하게 받지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대표 선수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제자 가룟 유다만 콕 집어서 말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마리아를 비난하고 꾸짖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생각처럼 동일하게 마리아의 행동이 지나치고 과하다고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보다 더 많은 생명의 섬김을 받은 자들 아닙니까?
이처럼 교회를 오래 다녔을지라도, 예배를 많이 드렸을지라도, 성경을 많이 읽었을지라도 모두 생명의 섬김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제자들 아닙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제일 많은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의 시점 안에서는 예수님을 가끔 보던 마리아가 훨씬 더 많은 섬김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말씀을 대할 때 다른 것입니다.
‘더 집중해서 말씀을 보고 더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고 더 힘을 다하여 하나님 예배해야 겠다.’
마치 같은 수업을 함께 들을지라도 온 힘을 다하여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학생과 마음을 풀어놓고 단지 앉아 있는 학생과 같습니까? 똑같이 교실 안에 앉아 있을지라도 다릅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어도 마음의 끈을 풀어놓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 선수로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을 팔아서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서 다 죽어가는 사람들한테 그걸 좀 나누어 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리겠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그것이 가룟 유다의 위선이고 진심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또 그는 돈궤를 맡은 도둑이라고 말씀하는데 그 때 도둑이라고 하는 표현이 도둑의 심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가룟 유다는 자기가 맡았던 돈궤에서 여러 번 돈을 빼돌렸다는 뜻입니다. 즉 가룟 유다는 돈을 많이 빼돌렸습니다. 혼자 재정을 맡았으니 얼마가 들어오고 나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더라도 가룟 유다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조금만 예수님한테 향유를 부어드려도 온 방안이 진동할 만큼 충분히 향기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당장 병원 갈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면 얼마나 가치 있습니까?
가룟 유다의 말을 읽고 있으면 엄청난 향유를 부은 마리아도, 그런 마리아를 칭찬하신 예수님도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서는 전혀 괸심이 없는 것처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회복하고 치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마리아의 인생 가운데 지금 가장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듯 그 순간 온 땅에서 가장 가난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정확히 유월절 엿새 전이기 때문입니다.
곧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내놓고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가난한 자로 돌아가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알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내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일 수도 있고 때로는 친구일 수도 있고 또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 멀리 있는 선교지의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은 절대 기준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이 내가 가장 가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는 나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이 가장 가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족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까?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가난한 누군가를 위해서 섬기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귀한 사랑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섬기거나 우리 가족을 챙기는 것은 그보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이든 심지어 나 자신일지라도 우리는 내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섬기는 일입니다.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섬겨야 될 가난한 사람의 대상 안에 가족이나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나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제외시켜놓고 저 멀리 있는 명분이 있는 섬김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 그가 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고 낮 모르는 이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랑의 섬김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의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있는 가장 가난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왜 몰랐을까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섬김을 베푸셨으나,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셨으나 제자들은 받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가룟 유다는 받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도 생명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종교로 교회를 다니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교회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분이 계속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부어주시니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생명 얻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도둑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본문 안에서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순수하게 그분의 말씀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다른 게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만 보면 가룟 유다의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님 따라다녔고 돈 때문에 예수님 제자가 되어 출세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때문에 그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선도 돈이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다양하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의 시선은 돈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계속 생명을 베풀어 주셔도 하나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의 생명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이 하루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계속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섬기실 텐데 그 생명의 섬김을 잘 받아서 우리 안에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더 충만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의 삶의 필요가 있고 우리가 해결해야 될 삶의 목표가 있으나 무엇보다 오늘 이 하루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섬김을 받는 하루가 되 주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주의 생명이 충만해지고 더 강력해지고 더 쌓이는 하루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더 알고 주님 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루가 되게 해 주셔서 그 넘치는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의 심령이 평안케 하시고 감사가 넘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 곁에 있는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 내가 섬겨야 될 가장 가난한 이웃이 누구인지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셔서 그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과 생명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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