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1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은 이제 예수님의 체포, 십자가 처형 그리고 시신의 처리와 장례의 전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와 제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다 마치시고 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에 들어가셨다고 1절에 말씀합니다.
이 동산은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혹자는 이 동산을 감람동산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다른 용어를 쓰지를 않고 그냥 ‘동산’이라고만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한 데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모든 사역을 동산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잃어버렸던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 즉 그분의 고난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동산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그 동산을 회복하시는 것.
구원이 무엇입니까?
“나 예수 믿으면 천당 가.”
이렇게 죽어서 천국 가는 단순한 그 일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천당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속적 개념입니다.
요한은 그렇게 구원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이해한 구원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죽어서 가는 그 나라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5일 동안 창조하셔서 선물로 주신 그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아담이 그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곧 동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동산을 다시 회복하는 것.
화염검으로 둘러싸여서 들어가지 못하는 그 동산이 우리의 삶 가운데 즉 이 땅에서 회복되는 것을 요한은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동산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시고, 그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1절 말씀입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수님은 그 건너편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혼자 가신 게 아닙니다.
그 동산에 주님은 혼자 가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즉 우리와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될 곳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드론 시내입니다.
기드론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급히 도망갔을 때 바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그 때 기드론 시내는 굴욕의 시내를 뜻합니다.
주님이 그 굴욕의 시내를 건너셨습니다.
그리고 역대 왕들이 종교개혁이 있을 때마다 모든 우상들을 다 부셔버리고 태워버렸던 곳이 바로 이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그 때 기드론은 모든 우상들이 다 심판을 받고 모든 우상들이 다 무너지는 곳입니다.
요엘 3장 2절과 12절에 나오는 기드론 시내는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호사밧 골짜기라고도 불립니다. 최종적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산은 그냥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렸던 그 동산을 들어가려면, 그 동산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만 합니다.
굴욕의 시련을 건너야 합니다.
모든 우상들이 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다 파괴되고 다 가루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 합니다.
반드시 최종적 심판이 이루어지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만 합니다.
성경은 강을 건너는 것을 늘 구원과 연결해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는 심판의 바다 아닙니까?
그 곳에서 모든 애굽들이 다 심판을 받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던 애굽의 군사들이 그 홍해에 수장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때 애굽의 군사들은 애굽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애굽을 대표하는 게 무엇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이 계속 우리를 추격하고 따라옵니다.
그런 세상이 우리가 홍해를 건너고 난 후 홍해 바다 한가운데서 모두 심판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부활과 승리의 삶을 향하여 달려갈 때 세상이 선뜻 흔쾌히 우리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즐거웠다. 그동안 고생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렇게 바이 하고 인사하며 이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다시 잡아가려고 끊임없이 따라오고 쉬지 않고 추격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이미 홍해 바다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분명한 이유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 6가지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세상’입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 어떤 강을 건넙니까?
요단강을 건넙니다.
다 강을 건넙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어디를 건넙니까?
‘유리 바다’를 건넌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구원은 모두 강이든 바다든 건넌다고 말씀합니다.
즉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건너갈 수 있습니다.
심판을 받아야 홍해를 건너고 심판을 받아야 요단을 건널 수 있습니다.
요단을 건널 때 누가 심판을 받았습니까?
출애굽 1세대가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의 육신이 다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다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출애굽 1세대들입니다.
출애굽 2세대 즉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들,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았던 사람들, 세상에서 옛사람으로 살았던 존재들의 육신과 옛 사람이 모두 심판을 받고 새 사람이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옛 사람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사람이 기드론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 동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드론 시내를 누가 건넌다고 말씀합니까?
분명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건넜다”고 말씀합니다.(1절)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동시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대신’과 ‘함께’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셨으니 나는 안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분의 육체가 끝날 때 우리의 육체도 끝났습니다.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 우리의 옛 사람도 모두 끝났습니다.
‘대신’ 뿐 아니라 ‘함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절)
성경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예수님이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찾아 왔으니 나만 잡아가고 제자들은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건넜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살았습니다.
주님이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 시내를 건너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즉 주께서 우리가 받을 모든 심판을 다 받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받을 모든 사망을 다 받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받을 모든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드론 시내를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담겨서
주님 속에 들어가서
주님이 다 맞으시고 주님이 다 받으시고 주님이 다 당하셨고 우리는 그 주님 안에 담겨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굉장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내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주님이 다 받으시고 다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굴욕을 당하시고 주님의 십자가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서 기드론 건너 동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절)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전에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다시 그것은 주님의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긴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주님이 그 품 안에 품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동산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가 신앙에서 오해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변했습니까?
집이 변했습니까?
차가 변했습니까?
직장이 변했습니까?
아내가 변했나요?
남편이 변했나요?
자녀들이 변했습니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변했습니다.
뭐가 변했습니까?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동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작은 것이었고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산에 들어가기 전에 내 삶은 중요한 것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 가치 있는 것과 별로 가치가 없는 것,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과 내게 없어야 되는 것으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산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도 안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안에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도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1명의 제자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제자, 예수님께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한 제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굳이 꼽자면 요한 정도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동문서답 엉뚱한 소리나 하고 제대로 못 알아듣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수준에서 제자들을 바라볼 때 과연 그들이 흡족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이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들이기 때문에 굉장하고 특별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수준에서 제자들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마음에 딱 맞는 제자는 그나마 사도 요한 정도인데 그 사도 요한인들 예수님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고 3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예수님이 가르치고 만지고 다듬어도 도무지 3년 동안 수련한 성과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을 처음 뽑으실 때에도 그들이 탁월하고 훌륭해서 마음에 들어서 뽑은 것도 아니고 3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그들의 면면을 볼 때에도 한숨 나오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 제자들이 얼마나 잘하겠나“ 내가 있을 때도 못했는데 내가 없으니.’
이런 제자들인데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면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동산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해집니다.
다 의미가 있고 다 가치가 있고 다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동산의 삶입니다.
우리는 어떤 동산을 기대합니까? 동산 밖에서 없었던 것들을 갖게 될 수 있는 곳, 동산 밖에서 누릴 수 없던 것들을 누리게 되는 곳,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은 조금도 없는 곳으로 기대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내가 원했던 것들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은혜 받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동산 안에 거하게 되면 싫어하는 것들이 없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막상 동산 안으로 들어가보니까 별 거 없습니까?
여전히 내 삶은 비슷합니까?
다를 바 없어 보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이 그 동산 안에 없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동산 안에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좋아진다고 그러는데 별로 좋아진 것이 없네? 그냥 기분만 좋아질 뿐이네.’
기억하십시오.
변한 게 아니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동산 밖에 있을 때는 대부분이 불만스럽고 아쉽고 부족했는데 동산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하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달라진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에 들어가면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절)
필요 없는 것을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칼로 내 인생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다 잘라 없애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싹뚝 모두 제거해버리고 싶습니다.
질병도 제거해 버리고, 고난도 제거해 버리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도 제거해버리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어떤 사건들도 모두 잘라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있으면 안 되는 것, 나를 잡으려고 찾아온 위협하는 것을 잘라버렸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대단한 용기 아닙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군대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왔는데 기껏 조그만 단도 하나 가지고 나섭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렇게 나섭니까?
참으로 대단한 용기입니다.
우리 인생 안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힘이 없어서 마지못해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도 사건도 감당하고 당하고 있습니다.
힘만 있으면 다 제거해버리고 싶은데 그럴 용기도 없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나에게 힘만 생긴다면, 용기가 생긴다면 다 없애서 끝내버려야지.’
이런 마음이십니까?
만일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주님이 베드로의 행동을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아이고 잘한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가지고 뒤에서 쩔쩔매고 있는데 너는 목숨을 걸고 칼을 빼어 달려드니 참 기특하다.”
누가 내 편이 되어주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큰 힘이 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정말 고맙습니다.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뭔가 말해주면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고맙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칭찬은커녕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하시고는 도로 붙여놓으십니다. 나는 없애버리고 싶은데 주님이 도로 붙여놓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없애버렸습니다. 싹둑 잘라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또 붙여놓으십니다.
나는 싫어서 떠났는데 가보니까 그 사람이 거기 있습니다. 주님이 붙여놓는 것입니다.
그런 적 있지 않습니까?
말고의 귀가 다시 붙은 것처럼 우리 인생 안에 주님이 다시 붙여놓는 일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는 동산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고도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구속사 안에서 말고라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말고라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 그것이 동산의 삶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나를 잡으러 온 말고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쟁할 필요도 없고 씨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도 내게 필요한 것이구나.’
잘라버리면 주님이 도로 붙여놓으십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뭐 하러 목숨 걸고 힘들게 싸웁니까? 주님이 도로 붙여놓으실 건데.
주님이 잘했다고 응원하시고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없었으면 좋겠어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살려내십니다. 다시 붙여놓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이 다 믿음 안에서 동산 안에 있는 삶인 줄 믿으십시오.
그 어떤 것들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게 의미가 없고 가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작은 것 하나 없습니다.
다 내게 소중하고 필요한 것,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산의 신앙입니다.
어디가 동산입니까?
이 땅에 있는 동산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만드신 동산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이 당장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7장에서 주님이 뭐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내가 저들을 데려가지 않습니다. 저들을 세상에 두고 갑니다. 저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지켜주세요.”
주님이 그냥 데려가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이 악이라는 것을 주님이 다 아시는데 굳이 사랑하는 제자를 그냥 두고 혼자 의리 없이 가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남겨두고 가셨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본래의 동산은 따로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모형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지금 이 땅의 삶이 에덴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에덴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의 일터,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에덴의 식구들이고 에덴의 주민들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으면 이 땅이 에덴입니다.
그런데 이 에덴은 참 에덴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모형인 이 땅에서 뭘 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에덴의 삶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하고 모든 것들이 다 가치 있고 모든 것들이 다 의미 있고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고 내게 유익한 것이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믿음 안에서 그것들을 다 믿음으로 받아들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훈련,
나를 잡으러 온 말고도 내게 필요하니까 칼 들고 그의 귀를 제거해버리는 삶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당해야 할 것들은 당하는 것. 그렇게 본래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에덴, 참 에덴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잘 훈련받고 잘 조성 돼서 나중에 참 에덴에 들어갈 때 순조롭게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심으로 우리 안에 동산을 선물해 주신 줄 믿습니다.
동산에서는 잃어버릴 것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지금 다 내게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진리가 말씀하시는데 아직 내 마음과 내 눈은 그렇지 못합니다.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주장해 주셔서 진리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보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내 마음 같으면 지금 당장 칼을 빼어 이것들 다 제거해버리고 잘라 버리고 싶지만 주님이 도로 붙여놓으실 만큼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진리가 말씀하시니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육신의 검으로 우리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검으로 나의 심령과 나의 믿음 없음과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 잘라주시옵소서.”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기도하는 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심으로 우리를 동산에 있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 안에 놀라운 에덴이 회복되고 우리가 다시 동산에 살게 되었음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동산에 있게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삶이 다 소중하고 필요하고 중요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 줄 믿습니다. 어느 것 하나 내게 필요 없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없사오니 그렇게 보일지라도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이 모든 것들을 믿음 안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고 또 성령께서 진리로 비추어 주셔서 에덴의 모든 것들을 다 누리며 주님 만나는 그날 참 에덴에서 주님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잘 준비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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