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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요한복음 강해

나의 구속을 위해 쓰임 받은 불의한 가야바(요한복음 11:45-57)

나의 구속을 위해 쓰임 받은 불의한 가야바 설교동영상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골로새교회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요한복음 11:45-57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일로 인하여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가 많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 예수께 호응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자 민심의 동요와 소동에 민감한 로마 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유대 땅을 다스리는 통치 방법 자체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우려, 그 책임을 묻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는 염려, 자기들의 정치적인 입지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추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딱히 명분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처리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에게서 어떤 뚜렷한 죄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딱히 명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백성들이 예수님께 긍정적으로 호응하며 점점 더 많이 따랐기 때문에 난감했기에 그저 신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의논만 하고 있던 차에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무릎을 탁 칠만한 묘수 하나를 제안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하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를 죽여 제거하도록 하자!”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가야바는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우리의 유익만 생각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

오직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좋은 게 뭐냐?

예수가 사라지는 거다!
예수를 쫓아낼 수는 없으니 죽여서 제거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가야바가 제안했습니다.

가야바가 이 말을 하기 전 먼저 거기에 모여서 어떻게 예수의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하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

직설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이 정말 무식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에게 있어서 지혜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당장의 유익과 지금 현실의 문제를 모면하기 위하여 신앙을 저버리는 것, 믿음의 선택을 저버리는 것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약해지고 그 예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게 무엇입니까?

예수를 생명으로부터 더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과 더 친밀해지는 것.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 알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서 행하실 일들을 더 깨닫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진짜 지혜로운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야바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우리도 선택에 있어서 당장 육신의 유익만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가야바 못지않게 어리석은 사람임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야바의 말 뒤에 당황스러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51)

가야바가 한 말입니다.

가야바가 자기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가야바가 자기 뜻대로 말했습니다.

가야바의 계획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가야바의 성품과 가치와 사람 됨됨이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야바는 대제사장 아닙니까?

대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리는 사람이 죽임을 계획하고 죽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인데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2)

즉 가야바의 말은 그의 성품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 가야바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가야바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야바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가야바가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굉장히 악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라면 누군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살려볼 수 있을까 고민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백성의 죄를 정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일을 망각하고 오히려 정죄하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죽일 것까지 제안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지혜로운 것이고 오직 그것만 생각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가야바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을 위하여 전무후무하게 악한 제사장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렇게 불의하고 불경건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의 사람인데 하나님은 그런 가야바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 사건만 보더라도 우리는 미워할 사람도 증오할 사람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야바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처럼 우리 곁에 있는 악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살해하겠다는 의도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악하고 불의한 누군가가 나를 망하게 하고 나를 무너뜨리고 쓰러뜨릴 의도와 목적으로 악한 일을 계획하고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나에게 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우리가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야바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을 이루어 가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내게도 가야와 같은 사건이나 사람을 통하여 나의 구속을 이루어 가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 안에서 많은 사람과 사건을 통하여 나의 구속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대결하고 사건하고 씨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오늘 써야 할 안경은 딱 하나입니다.

구속의 안경!

우리는 구속의 안경으로 인생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생명의 섭리가 지금도 내 안에서 계속하여 나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으로 이끌어가신다.

우리의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 그 긴장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죄와 사망에서 건져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어린 아이는 태어나긴 했지만 다 자라지는 않은 상태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다 큰 줄 압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긴장 안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구속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속의 관점에서 오늘 우리의 인생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실 그전에는 육신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봤습니다.
그것이 곧 가야바의 시선입니다.

가야바도 자기 인생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자리를 지킬까?’

어떻게 이 자리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내 힘과 영향력을 더욱 확장시키고 더 크게 할까?’

오직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삶을 무너뜨리고 위협하는 존재는 다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가야바는 그의 말처럼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유익만 생각하자.’

내게 이로운 것만 생각하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자.’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니까 그는 예수님 살해하기를 제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바는 내 인생에서 더할나위 없을 만큼 악한 사람이 맞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가야바와 같은 사람도 사건도 우리 인생 가운데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 사람과 사건을 가야바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내 인생에서 없애버려야 되는 사람입니다.

빨리 내 인생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혹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피해서 사라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의 시선입니다. ]

그런데 이것을 구속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나의 구속을 위하여 이 가야바를 사용하고 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의 구속을 위하여 가야바의 악한 성품, 악한 말, 악한 계획, 악한 행동들을 사용하시는구나.’

구속의 렌즈로 우리 인생 가운데 있는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분노보다는 어떻게 내가 이것을 나의 구속을 위하여 사용할까를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4)

3~4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간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세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고 계시는 AD 303월에서 4월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됩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이 두려워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잠시 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구속의 시간을 따르기 위하여 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의 시간표 때문에 피하셨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요한이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머무르셨습니다.

실제 이 기간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하시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를 거치신 사건도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회심하는 사건도 이 기간 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른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다 생략합니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요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머무르셨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인생 안에서 가야바와 같은 사건을 겪어낼 때 그 사건을 구속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급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오늘 우리 인생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인생을 계획하고 시간을 짜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늘 우리의 인생의 시간 계획표는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 계획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 계획표로 우리 인생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막연하게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예수님을 향한 구속의 시간표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제자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야바와 같은 사람과 일을 만날 때 구속의 사건으로 깨달아 받아들이고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더욱 구속을 이루어 내실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건을 통하여 어떻게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경험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되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져 갈까?

우리는 그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가야바 같은 사건을 통하여 더 예수님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가야바처럼 육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되는 기회를 모두 놓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 친밀하게 만나고 그분과 교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선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그렇게 훈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즉 진짜 예수 그리스도로 더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더 찾고 더 만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55)

55절에 보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월절이 되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데 보통 유월절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도착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례 때문입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들은 정결해져야 되었습니다. 정결 의식을 치러야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고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유워절에 딱 맞춰서 오지 않고 일주일이나 한 2주 먼저 왔습니다.
그렇게 먼저 예루살렘에 와서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하여 정결례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55절을 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올라옵니다. 그렇게 올라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56)
이 때 찾으며혹시 예수님 봤어?”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알아?” “없나? 아직 안 왔나?” 이런 뜻이 아닙니다.

아주 집요하게 열심히 찾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은 유월절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해 줍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유대 사회 안에서 굉장한 이슈를 일으킨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자마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찾았던 자들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였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57)
예수님이 지명수배자가 되었습니다.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예수님을 알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신고하고 잡아서 현상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집요하게 예수를 찾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간절히 부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고 원합니까?

예수님을 간절하게 집요하게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우리의 삶의 모든 사건들을 구속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표를 기다리면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는 교통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진짜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도들이 목사인 제게 원하는 것과 목사인 제가 성도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제가 주고 싶은 것과 항상 일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줄 수 없는 것 혹은 제가 줄 필요가 없는 것, 때로는 제가 줘서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안 맞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하나님나라를 잘 안내하라고 제게 목양지를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때때로 성도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별로 관심 없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 것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 맞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왜 오셨습니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어떤 생명입니까?

생명은 세 가지입니다.

육신 생명, 즉 육신의 목숨을 연장시켜주기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런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가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받아서 건강해져야 합니다. 내가 힘이 약하고 몸이 약하여 육신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림 생명, 그것도 생명입니다. 가난한 살림살이가 부유해지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지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원 생명,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생명은 육신 생명도 아니고 살림생명도 아닙니다. 영원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을 나눠주고 싶어하셨는데 예수님께 무엇을 원했습니까?

어제 먹은 물고기와 보리떡을 또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맞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교제하여 그분과 신령한 교통 안에 들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주러 오셨는가? 그거를 깨닫고 그거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게 주시려고 하는 것들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영원 생명을 요구하지는 못합니다.

모르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물고기를 원하고 보리떡을 원합니다.

그렇게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으면서 주님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떡과 물고기 먹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님하고 친밀해지는 밥상 위에 있는 도구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내게 그 밥을 먹이는 것만 목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왜 우리가 함께 밥을 먹습니까?

그것은 비단 음식을 먹으면서 배를 채우려는 것만 목적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함께 밥을 먹으면서 오로지 내 관심이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초대해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오직 음식 이야기만 하고 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나와 이야기하면서 마음도 나누고 싶었는데, 밥만 실컷 먹고 갔다면?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상을 차려주십니다. 때로는 보리떡도 주시고 또 때로는 물고기도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에서 육신생명에 필요한 것도 제공해 주시고 살림생명에 필요한 것도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영원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육신 생명만 잔뜩 받아 채워간다거나, 살림살이 좋아진 것에만 관심을 두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육신의 문제도 해결 받고 살림살이 문제도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계속 친밀하게 교제하고 알아가면서 정말 나의 구속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구속은 영원 생명으로 채워지고 영원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것, 그 영원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

우리 안에 나를 찾아오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입니까?

참 그리스도를 계속 찾아가고 그분을 더 원하고 그분을 더 알아가는 일들을 구속의 시간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표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믿고, 혹 가야바를 만날지라도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저 악인을 하나님께서 나의 구속을 위하여 사용하신다.’ 믿음으로 맡기십시다.

그 가야바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용하여 일하실 때 하나님이 구속의 시간 안에서 나는 어떻게 주님과 더 교제하고 주님을 더 알아낼까?’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영원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 친밀해지고, 영원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우리를 풍성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찾고 추구하는 믿음의 진보로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만나게 될 가야바와 같은 사건과 사람이 있겠지만, 사건과 씨름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과 다투지 않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들인 줄 믿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그 구속의 시간표를 따라 그리스도와 친절하게 교제하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원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우리 안에 영원 생명이 더 충만해지는 믿음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