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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목사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 설교

빌라도와 헤롯(고난주간 특새 1일차, 누가복음 23:1-12)

빌라도와 헤롯 설교동영상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누가복음 23:1-12

 

우리로 어제(일요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난 뒤 잠시 성전을 둘러보시고 다시 베다니로 나가셨다가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아침 일찍 성전을 가시기 위하여 나오셨습니다. 그 길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당시 성전이 열매 없는 성전, 열매 없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것 역시 깨끗케 하시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열매 없는 성전, 열매 없는 종교, 열매 없는 죽은 신앙을 저주하셔서 그 성전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월요일에는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화요일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수요일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 행적에 관하여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목요일, 유월절을 위하여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에게 준비케 하십니다. 그렇게 유월절의 목요일을 지내십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유월절 날짜는 14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3일에 유월절을 지내셨습니다. 즉 하루 앞당겨서 유월절을 지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신 이유는 지금까지 지낸 모든 유월절이 그 다음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이상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절기로서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됩니다. 때문에 주님이 그 전날 하루 앞당겨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함께하시면서 유월절을 성만찬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은 종결되었고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즉 생명을 주신 주님의 사건을 기억하는 성만찬이 우리에게 다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감람원이라고 하는 감람나무 농장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기도를 하시다가 금요일 새벽 2시에 체포를 당하십니다.

그렇게 체포를 당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까지 총 7번의 심문을 받습니다.

이 모든 심문은 두 가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참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유월절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모든 제물들은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흠이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일곱 번에 걸쳐서 확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흠이 전혀 없다는 것이 한두 번 점검이 되어서 확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 확인됩니다.

성경에서 일곱 번은 온전 혹은 완전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즉 예수님은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흠이 있는지 없는지 세밀하게 조사를 받으셔서 흠이 없는 분으로 우리의 우주적 제물이 되셨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 일곱 번의 심문을 통하여 총 일곱 명의 사람들(사람 수로는 6명이지만) 일곱 번에 걸쳐서 심문하는 각각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예수님께 질문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오늘 우리의 죄악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일곱 번 심문 받으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역으로 우리가 심문하는 그 모든 것들과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못 박히고 종결되고 끝났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일 처음 예수님을 심문한 사람은 전 제사장이었던 안나스입니다.

그가 비록 전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실권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었고, 그의 세 아들과 사위까지 모두 제사장이 될 만큼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안나스에게 제일 먼저 심문을 받으십니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데 이 때 안나스는 전통을 상징합니다.

즉 전통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에서 예수님은 전혀 흠이 없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은 전통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인데 역으로 그 전통이 우리의 모든 전통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못 박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전통들이 다 못 박혔고 우리는 이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어제는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연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날을,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심문은 현직 제사장이었던 사위 가야바입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이 때 가야바는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유월절은 모형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였는데 그것은 모형입니다.

유월절에 드려지는 양도 모형입니다.

즉 참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못 박히시는 것이 참 유월절이고 그 유월절의 모형이 지난 모든 유월절의 절기들입니다.

출애굽 이후의 유월절은 목적지가 한 곳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날이 목적지입니다. 그 날을 향하여 계속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드려진 모든 양들은 참 양이요 참 제물이신 모형입니다.

참 유월절이 온다는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진짜 유월절이 온다는 것입니다.

진짜 양이 우리들을 위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기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에 양을 잡아 그 양고기를 먹으면서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유월절이 왔습니다.

참 유월절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참 유월절의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의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그 모형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모두 다 모형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도, 모든 찬송도 다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읽고 있는 그 모든 성경의 각각의 구절 역시 한 절도 빠짐 없이 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를 예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찬송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종교입니다.

그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지 못한 채 성경을 읽을 때에도 윤리와 교훈만 배우고 자기 개발과 인간의 처세를 발견하고 있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목적이 나에게 복이 더 임하기를, 복을 구하는, 기복이 전부라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그저 좋은 음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교입니다.

그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교가 못 박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가야바의 심문이 끝나고 산헤드린이 열리려면 날이 밝아야 하는데 날이 밝으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유월절은 금요일 저녁부터 유월절이니까 유월절이 되기 전에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산헤드린이 열리기 전에 소산헤드린(소공의회, 작은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즉 산헤드린 70명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들이 모여서 예비심문을 했습니다. 그 예비 심문은 지식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정체와 자기들의 이해관계와 자기들의 지식과 자기들의 교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기 의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날이 밝자 산헤드린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율법이 참 율법이신 그리스도를 심문합니다.

율법을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나마 제대로 지키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율법이 못 박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 모독을 죄목으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합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는 사형을 언도할 수는 있지만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형의 집행 권한이 있는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다시 넘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져서 빌라도의 관정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대표입니다.

이제는 전통과 종교와 교리가 예수님을 심판합니다. 심문합니다.

거기에서 사형 언도가 떨어집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종결되고 처리되었다는 것이고 이제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합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한다고 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세상이 못 박히고 세상이 종결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문을 하는데 빌라도가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헤롯 안티파스(세례 요한을 죽인 자이고, 갈릴리의 분봉왕입니다)에게 넘겨서 헤롯 안티파스가 여섯 번째 심문을 하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육체의 이득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이득을 위해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믿고 또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이 곧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 육체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고, 그 예수님을 대적하는 육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 번 심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다시 빌라도에게 옮겨져서 마지막 심문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의 심문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산헤드린이 빌라도에게 넘기기 전에 사형을 언도할 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왜 신성모독입니까?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고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람하다고도 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사형이 언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예수님을 사형으로 언도하게 되는데 그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고 했던 그 죄가 우리의 죄임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심판 받은 죄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에덴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만이 죄일까요? 아닙니다. 계명을 어겼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아서 부모들이 화가 납니까?

정작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가 부모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 또한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바로 우리의 죄이고 그 죄가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끝났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에서 신성모독으로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하고 최종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넘기는데 빌라도에게 넘길 때 예수님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1. 백성을 미혹하게 했다.

2.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

3. 자칭 왕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 죄목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죄목은 우리의 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미혹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원합니다. 세상을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더 많이 소유해서 그 세상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좇아갑니다. 세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는데 사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왜곡합니다. 그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모함을 합니다.

성경에서 세금은 그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돈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세금은 내가 그 백성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죄는 세상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순종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

세상에 모든 것에 나의 모든 삶들이 맡기는 것.

나의 존재가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세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세상에 세금을 내는 삶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내야 할 세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이라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 세금을 온전히 제대로 내고 있지 못하니 그것 또한 우리의 죄목입니다.

 

그리스도가 왕인데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왕노릇하거나 누군가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 내 인생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 또한 우리의 조목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고발했던 이 세 가지 죄목은 우리의 죄목이 되는 것이고 이 세 가지 죄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끝났고 종결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즉 빌라도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맞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인 동시에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빌라도의 죄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도 통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지만, 믿는다고 말하지만 적지 않는 경우 우리의 믿음은 그저 교회에서만 통하고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는 사람들끼리 안에서만 그 믿음이 이야기되고 통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말하고 믿음이 통한다고 생각하면서 믿음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많은 교인들이 믿음은 교회 안에서만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그 자리에서만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는 믿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을 이야기해봐야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빌라도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던 질문입니다.

그 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믿는 사람들끼리, 그 안에서만 통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들만의 왕이 아니라 믿는 자들만의 왕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통치하시는 주권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니 이 온 세상의 왕이시고 이 온 우주의 왕이시고 지금도 그분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며 이 우주와 만물을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는 빌라도의 신앙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는 우리만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 온 우주의 왕으로 고백하는 그 신앙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 안에 다시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합니다.

빌라도가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말합니다.(41522)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예수님의 흠 없음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입장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봐도 정치적인 문제 같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종교적인 문제 같은데 이 공을 빌라도에게 넘긴 것 아닙니까?

껄끄럽습니다.

그런데 심문을 하다 보니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1차적 재판권은 그 지역의 분봉왕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예수님의 일차적 재판권한은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껄끄럽던 재판인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침 예루살렘에도 헤롯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헤롯이 마침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터라 멀리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님을 보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8)

헤롯은 오랫 동안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바로 그가 예수님을 보고 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적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나 이적 행함을 볼까 하는 기대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헤롯은 육체로 사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믿어도 육체로 믿었습니다.

육체로 믿었을 뿐 아니라 늘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헤롯 안티파스의 신앙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심을 들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굶주린 자임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눈 먼 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인지 맹인을 데려다가 한 번 고쳐보라고 하면서 그 일이 진짜 일어나는지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이 눈 먼 자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가 싶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찾아서 불러다가 예수님 앞에 앉혀놓고 일으켜보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기적을 요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보건대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스스로 영적인 앉은뱅이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그래서 걸리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문둥병을 고치셨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쳐보라고,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어보라고 하면서 기적을 요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영적인 문둥병자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에게 다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보라고, 앉은뱅이를 일으켜보라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해보라고, 문둥병을 고쳐보라고 기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으로 굶주린 자이니 나를 배부르게 해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나는 늘 갈급하고 허전하고 공허하고 아무리 좋은 별장에서 살아도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해도 늘 허기진 자인데 이런 나를 배부르게 해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내가 앉은뱅이여서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스스로 걸어가려고 해도 계속 넘어지는 자이니, 계속 실족하는 자이니, 계속 쓰러지는 자이니, 계속 무너지게 하는 자요, 계속 망가지게 하는 자인데 나를 일어서게 해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내가 다 보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 나는 눈 먼 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니 내 눈을 열어 세상을, 삶을, 인생을, 사람을, 이 나라를 분별할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내가 영적 문둥병자와 같이 심각한 죄인이라 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는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나의 영적인 문둥병을 치유해달라고, 나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 헤롯 안티파스가 십자가 못 박힌 것입니다.

그 헤롯 안티파스가 바로 우리 자신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지만 육체로 믿고 육체를 위해서 믿는 우리들.

언제나 육체를 추구하며 육체를 우상 삼는 우리들,

예수님을 믿지만 항상 기적을 요구하고 뭔가 인생 안에 놀랍고 놀라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서 내 삶이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우리들.

예수님이 그런 분으로 우리 인생 안으로 찾아오시기만을 소원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 헤롯 안티파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줄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심문했던 여섯 명의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봐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전통적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지식과 교리에 묶여 있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율법적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육체적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육신적인 사람인지 이들을 통하여 만나게 되고 그것이 내 모습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처리할 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주님이 이런 나를 처리하시기 위하여 나를 찾아오셨고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못 박히심으로 그 때 주님 홀로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내 대신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못 박히셨으니 나도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 종결되고 끝난 줄 믿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입니까?

예수님은 이 심문을 끝내시고 십자가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십니다.

그 걸음을 통하여 우리도 그분과 함께 동행하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의 풍성함을 우리도 풍성히 누려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더 풍성한 생명이 되고 더 풍성한 영광이 되고 더 풍성한 자랑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을 심문했던 이 여섯 명의 사람들은 바로 내가 주님을 심문한 것이고, 그 여섯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끝난 것은 바로 내가 십자가에서 끝날 줄 믿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주님을 소망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자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나를 처리하시고 나를 끝내시고 나를 종결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된 줄 믿고 이제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그 생명을 기뻐하며 그 생명을 더 얻기 위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