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누가복음 23:26-33
26절부터 31절까지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처형장으로 이동하시는 장면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슬퍼하는 여인들을 향한 권면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이 시행되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1. 군병들에게 매질을 당하심
2. 골고다까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심
3. 십자가 형틀에 못 박힘을 당하심
26절은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부분으로 누가복음은 빌라도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홀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긴 행렬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맨 앞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다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구레네 시몬의 뒤에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야 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지고 가는 그 십자가는 십자가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두 면으로 말씀하십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졌다기보다는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셨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즉 본문 말씀은 구레네 시몬이 져야 할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또 예수님이 지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저주와 우리의 모든 사망과 우리의 모든 어둠과 우리의 모든 불행과 우리의 모든 실패가 그 십자가에 걸쳐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래 생명이시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그 생명이 십자가에 얹혀졌다고도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 묻어 있고 그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지므로 그 십자가의 모든 공로가 구레네 시몬의 것이 되었고 동시에 구레네 시몬에게 있던 모든 죄로 인하여 오염된 저주가 십자가에 얹혀서 다시 예수님이 지게 되었습니다.
즉 그 십자가에서 위대한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두 면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내기 위하여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많은 군중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뭔가 궁금하여 호기심에 따라갔다가 재수 없어서 붙잡혀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억지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서 진리로 더욱 들어가면 구레네 시몬이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셨습니다. 즉 내가 져야 마땅한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고 가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나의 모든 형벌들 즉 죄와 사망과 저주와 불행과 어둠과 실패와 고난과 슬픔 등 나의 온 인생을 주님이 지고 가셨고,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나에게 오게 되었다는 두 면을 구레네 시몬을 통하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내가 지어야 할 나의 십자가가 포함된 것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의 뒤를 두 강도가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뒤로 주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가 함께 따라갔습니다.
조롱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주님을 따라가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는 여인들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에는 긴 행렬이 있었음을 사복음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긴 행렬을 기록한 4복음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이 긴 행렬을 기록할 때 그 때 그 당시에 사람들만의 행렬을 보고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영원한 현재의 시각에서 이 행렬을 보고 기록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현재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뒤를 많은 무리가 따랐다는 것은 영원 안에서 보면 그 안에 나도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말씀은 2천 년 전의 일이고 나는 2천년 뒤를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영원 안에서 보면 그 때 그 무리 속에 나도 있었고 나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의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4복음서가 기록되었음을 진리 안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제3자의 입장에서 십자가의 뒤를 따르던 행렬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그 행렬들 속에 우리도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예수 안에서 일어난 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이야기, 역사의 기록에 불과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행렬 가운데 바로 예수님 뒤를 따라갔던 구레네 시몬에 관한 말씀을 중심으로 보려고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여 십자가의 공로를 얻은 사람입니다.
억지로 혹은 운이 없어서 피부색이 겁다는 이유로 지은 죄도 없는데 잡혀서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길에 참여함으로 인하여 구레네 시몬과 그의 가문은 위대한 십자가의 공로를 얻게 되는 놀라운 복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서는 바울이 마지막 문안인사를 쓸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사도 바울이 괜히 구레네 시몬의 아내였던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불렀겠습니까?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내였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였던 사람은 바울의 영적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레네 시몬은 바울을 양육한 자가 되어 놀라운 믿음의 새 언약의 제사장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신약에는 대표적인 두 명의 시몬이 나옵니다.
한 명은 시몬 베드로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이스라엘의 시몬은 베드로 즉 반석이 되었습니다.
구레네에서 온 이방인 시몬은 십자가를 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입니까?
유대인 베드로 시몬을 부르시고 이방인 구레네 시몬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집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짓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의 집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레네는 지금 현재 북아프리카 리비아 곧 검은 지역입니다.
즉 영적으로 보면 구레네 시몬은 영적으로 검은 지역에서 온 사람이라고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검은 지역에서 온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므로 십자가의 공로를 받아서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 주고, 주님의 모든 공로를 내가 받았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교환이 구레네 시몬이 졌던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가문에서 복음 사역에 귀한 바울과 같은 아들을 양육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입니까?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이 십자가를 진 것으로만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를 통하여 많은 이들을 얻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셨습니다.
이처럼 구레네 시몬이 졌던 그 십자가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속한, 아버지의 모든 생명, 아버지의 모든 의, 아버지의 모든 거룩, 아버지가 가진 모든 재산(영적 재산이든 이 땅의 재산이든)을 상속 받는 상속자가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시 놀라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 다시 새로워지는 것! 다시 온전해지는 것! 다시 세워지는 것!
그것이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입니다.
구레네라는 북아프리카 지역은 우리의 인생의 검은 지역이고 우리 인생의 가장 남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북쪽에서 가장 동쪽에서 가장 서쪽에서 가장 남쪽에서 각각의 제자들을 얻습니다.
가장 북쪽인 가이샤라 빌립보에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얻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가장 북쪽인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곳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 곳에서 베드로를 취하셨고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가장 동쪽에는 거라사가 있습니다. 거라사 지역에는 ‘거리사의 광인’이 있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를 취하시고 그를 얻으셨습니다. 그 거라사의 광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너는 여기 남아서 네 집에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을 전하라!”
그렇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라사 광인은 거라사가 포함된 데가볼리 열 개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그 땡에 수많은 교회들이 그 지역에 세워지게 했습니다.
가장 서쪽에는 두로와 시돈이 있습니다. 그 두로와 시돈에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남편 없이 자녀만 있는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릴 환경에 처했습니다. 그 자녀까지 잃게 될 환경에서 구주를 만나 자녀가 치유되고 자기의 질병도 치유되는 놀라운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가장 남쪽에는 누가 있습니까? 구레네 시몬입니다. 가장 남쪽 검은 지역, 우리의 영적인 검은 지역에서 주님이 취한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은 하나님의 위대한 십자가의 공로를 은혜로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북쪽의 제자들이면서 동쪽의 거라사 광인이면서 서쪽의 가난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과부이면서 가장 남쪽 영적으로 검은 지역에서 온 구레네 시몬인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 얻으셨습니다. 이들을 다 찾아가셔서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조성하시고 온전하게 세우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시므온은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그는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여동생 디나가 폭력을 당하게 되자 그의 동생 셋째 레위와 함께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들이 속한 모든 성읍의 남자들을 칼로 죽였던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생 형제 요셉을 애굽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린 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갔다가 요셉에게 붙잡혀서 요셉의 인질이 되어 감옥에 갇혔던 자가 바로 시므온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에 대하여 아버지 야곱이 마지막 축복을 할 때 뭐라고 축복합니까?
굉장한 분노와 잔인함을 드러내는 아들이 될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아버지 야곱이 아들 시므온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언제 저주를 받습니까?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그 때 저주를 받아 그들의 모든 노여움과 모든 분기가 그 십자가에서 처리됩니다.
구레네 시몬 이 이름의 기원이 야곱의 아들 ‘시므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한 면에서 시므온이라는 구약의 옛 사람의 이름 안에서 그러한 폭력과 잔인함을 가진 존재였으나 새사람의 관점에서 신약의 이름 안에서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응답이신 존재로 새롭게 된 새 생명의 새 언약의 놀라운 영적 제사장의 가문으로 바꿔지고 새롭게 세워졌던 사람이 바로 시몬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원 뜻이 바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버지가 축복한 대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우리들도 검은 땅에서 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면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응답이고 또 한 면에서는 요셉을 팔아버린 악한 형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주에 의하여 우리의 가문은 쓰임을 받고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문이 바울을 내고 수많은 믿음의 형제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경륜 안에 우리들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구레네 시몬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억지로 진 십자가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구레네 시몬이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옛사람이 다 죽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구레네 시몬처럼 위대한 가문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세워지고 사용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시몬의 가문이고 내가 구레네 시몬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야곱의 아들 시몬처럼 폭력과 잔인함을 가진 존재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종결되었고 끝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응답이 되는 인생,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음의 가문으로 다시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인생으로 회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야곱의 아들 시몬처럼 잔인하고 폭력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레네 시몬처럼 어두운 지역에서 온 영적으로 어두운 자이고, 우리의 육신의 삶은 칠흑같이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둠이 십자가에 얹어져서 주님이 가져가시고 주님의 놀라운 생명의 공로가 우리에게 부어져 위대한 십자가의 교환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가문이 위대한 믿음의 가문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가문도 새생명, 새언약으로 제사장 가문으로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하옵소서. 위대한 복음의 사람들이 나오게 하시고 위대한 생명의 사람들이 배출되게 하시며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복된 자들이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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