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고난주간 2일차)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없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누가복음 23:13-25
예수님께서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유월절 제물로 드려지기 위하여 그분에 얼마나 흠이 없으신가에 관하여 총 일곱 번에 걸쳐서 면밀하고 자세하게 심문을 받습니다.
이 예수님을 향한 일곱 번의 심문은 곧 우리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심문한다는 것은 곧 역으로 우리가 심문을 당한다는 뜻이며 그 모든 자들의 심문 역시 바로 오늘 우리의 죄임을 어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다시 한 번 심문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네가 누구냐?”
“나 안나스야!”
“나는 대제사장이야!”
“내 사위도 현직 제사장이야 그런데 너는 뭐냐?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
이런 질문입니다.
“난 별로 너한테 관심도 없는데 네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며?”
이렇게 구주에 대한 무지와 구주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알고자 하지 않는 것, 그분을 더 원하지 않는 것,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범죄를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범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처리되고 종결되고 끝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그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
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더 아는 일에, 그리스도를 더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여겨 우리의 모든 이로운 것들을 해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더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주간 살면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경 윤리 안에서 우리가 마땅히 하지 못할 것 정도만 회개합니다. 사실 그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습관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도 내용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오늘 우리에게 잘못된 회개일 뿐 아니라 우리의 회개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그분에게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바로 안나스의 죄였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가야바는 현직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조사를 면밀하게 한 듯 합니다.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그 정보를 가지고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네가 성전을 부순다고 했냐?”
“네가 성전을 부수고 사흘만에 다시 세운다며?”
“내가 대제사장이야. 내 종교야! 내가 종교야!”
이런 태도입니다.
가야바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오는 새창조와 새생명과 새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야바는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겼는데?”
“그런 나를 보고 종교라고 한다고?”
“그런 내가 종교인이라고?”
내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니 종교가 참 생명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참 소망이신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야바입니다.
그래서 가아뱌는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다 가지고 일일이 대조를 하면서 확인을 하는데 작은 공회를 소집하고 만들어서 거짓 증인들을 세워 그 모든 죄들을 예수님께 뒤집어씌우고 산헤드린에 넘깁니다.
산헤드린은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교훈을 율법의 관점에서 보아서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사형 판견을 합니다.
사형 판결을 할 수 있으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던 산헤드린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예수님을 유대적인 요소로만 바라봤습니다.
유대의 관점 안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우리처럼 신앙을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믿음은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였을 때 통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그 신앙은 통하지 않고 그 신앙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헤롯은 한번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문둥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눈먼 자를 고치는 기적을 여기에서 해보라고 합니다. 자기가 영적으로 굶주린 자요 자기가 앉은뱅이요 자기가 눈 먼 자요 자기가 문둥병자임을 모른 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육신으로 예수님을 심문했던 자가 바로 헤롯입니다.
이 여섯 명의 사람들은 면밀하고 세밀하게 예수님을 심문하였지만 죄가 발견되지 않고 죄가 없어 판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일곱 번째 본문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 빌라도의 법정에 총체적으로 다 모였습니다. 모든 고발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모든 백성들이 다 모여서 총체적으로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죄가 발견되지 않자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말하지만 무리들은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즉 예수님을 없애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13절부터 25절은 빌라도가 한 예수님의 마지막 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무죄성을 공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차라리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거세게 반발합니다.
13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다시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지만 역시 무리들은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강하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뜻이 좌절됩니다.
20절과 21절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장면은 역시 빌라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러면 때려서 놓겠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감정이 그렇다면 때려서 놓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때릴 만한 죄도 없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협상을 하자고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무리들은 큰 반발을 하면서 그 반발에 껶여 결국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십자가 처형이라는 최종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22절부터 25절의 말씀입니다.
무리들의 이러한 요구는 어떤 것입니까?
거듭하여 계속하여 구주가 싫으니까 없었으면 좋겠다는 외침입니다.
구주가 내 인생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모형을 한 나무 아닙니까?
나무는 저주를 뜻합니다.
나무에 달린 모든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나무는 저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나무에 매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저주가 이 사람에게 실리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종결입니다. 종결시키고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저주를 다 퍼부어버리고 그 저주를 받은 예수님이 없어지면 우리의 저주도 없어질 것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저주를 일으키는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저주를 다 담고 십자가에 달리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빌라도가 사형언도와 사형집행을 명령하고 난 뒤에 놀라운 한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바라바가 석방되는 사건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판결을 받고 십자가를 지시자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바로 바라바의 석방이었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자입니까?
살인과 민란을 일으킨 자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라바는 'Βαρ-αββάς'(바르-아빠스)로 나타난다. 이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아람어인 'בר-אבא'(바르-아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바르’와 ‘아빠’ 두 단어가 결합된 말로서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아빠는 아버지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히브리어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자마자 가장 먼저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라바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바 그 이름대로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로 풀려났습니다.
우리가 석방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선물 아닙니까?
정말 큰 선물입니다.
석방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선물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석방될 수 없는 살인과 민란을 일으킨 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살인을 했습니까? 미워하는 것조차도 살인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가족들을 미워했고 나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직장에서 우리의 동료들을 미워했고 우리의 이웃들을 미워했습니다. 때때로 부모님을 미워하고 자식도 미워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던 자들입니다.
민란이라는 단어는 ‘맞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민란을 일으킨 자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맞섰습니까? 진리에 맞섰고 교회에 맞섰고 질서에 맞섰고 권위에 맞섰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고집과 굳은 마음으로 항상 모든 일에 맞서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바라바였습니다.
그러니 풀려날 수 없는 우리가 풀려난 것만으로도 받을 수 없는 큰 선물인데 누구로 풀려났습니까?
아버지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로 풀려남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이후 첫 번째 사건입니다.
산헤드린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처음 넘길 때 그 예수님에게 붙여진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1. 백성들을 미혹케 한다.
2.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 자칭 왕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죄목이 아니라 우리의 죄목입니다.
여기에 바라바의 죄목이 두 개 더 붙여집니다.
4. 살인한 자
5. 민란을 일으킨 자
때문에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입니다.
내가 막연히 어떤 죄를 지었는지, 끊임없이 우리가 행동한 윤리적인 행위들에 계속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크고 대단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의 심문을 반복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리 안에서 발견해야 되고 그 죄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바로 그런 자임을 경험하지 못하면,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가 작아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받은 복이 적어서 우리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복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행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고 또 내가 그분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셨구나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고 할 때, 우리에게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고 할 때 그 선물을 받을 대상을 어떻게 선정합니까?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우리가 너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누구에게 주려고 할 때 아무에게나 줍니까?
그 선물을 받을 사람들을 고릅니다.
그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그 선물을 받아서 그 선물을 잘 쓸 사람에게 선물을 주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선물, 엄청난 선물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지금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데 그것을 제일 먼저 받을 사람이 누구일까?
그 선물을 제일 먼저 받을 사람이 누구일까?
그 선물을 제일 먼저 받을 사람이라면 적어도 의로운 자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수준에서는 의로운 자가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 선물을 제일 먼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 누군가에게 많은 선을 행했던 이를테면 욥바의 다비다 즉 도르가 같은 사람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선물을 제일 먼저 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선물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 살인과 민란을 일으킨 흉악한 죄인 바라바였습니다.
하나님께도 맞서고 교회에도 맞서고 부모에게도 맞서고 일터에서도 맞서고 분란을 일으키고 시끄럽게 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제일 먼저 그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바라바를 통하여 두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첫째는 바라바와 같은 자가 바로 나라는 묵상입니다.
내가 바로 바라바입니다.
그런 내가 구속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설령 내가 그런 자라고 잘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면 나는 당연히 받지 않았겠습니까?
바라바도 받았는데 내가 왜 못 받겠습니까?
바라바도 해방이 되었는데 나는 왜 해방되지 않겠습니까?
바라바도 풀려났는데 나는 왜 풀려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그런 나를 왜 풀어주셨을까 하는 묵상입니다.
성경에 바라바에 대한 정보가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바라바에 대한 상상력을 많습니다.
심지어 소설로도 바라바가 등장을 했습니다.
그 바라바가 풀려나고 난 뒤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일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바라바를 하나님이 풀어주셨다면 그 바라바는 예수님 덕분에 풀려난 자 아닙니까?
예수님 때문에 풀려났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바라바는 그렇게 끝날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풀려났습니다.
예전처럼 똑같이 살라고 하나님이 바라바를 풀어주셨겠습니까?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풀어주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삶을 살던 바라바였지만 이제는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과 맞서는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로 살지 않았을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 바울에 관하여 뭐라고 사람들이 말했습니까?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복음으로 어지럽게 하는 자, 즉 복음과 믿음의 삶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인하여 악한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고 악한 삶을 살아가는 그 세상의 질서를 흔들어버리고 그렇게 살지 않아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방식과 자기의 길로 살아갈 때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고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고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리석은 길이라고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다고 여겼던 그 길을 가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때, 그 사람의 삶에서 기쁨이 넘쳐날 때, 거기에서 능력이 넘쳐날 때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그 삶은 자기에게 어느 한 순간도 만족을 주지 못했는데, 자기가 비웃고 조롱하고 우습게 여겼던 믿음의 삶은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흔드는 자로, 세상을 무너뜨리는 자로 참 생명의 길을 걸어가라고 바라바를 풀어주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바라바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놀라운 우주적 선물을 받고 풀려나면서 그에게 새로운 삶이 사명으로 명령으로 주어졌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라바의 인생은 반드시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바라바는 그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전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소유하여 살아난 자들은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칙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것을 생명으로 소유한 자는 그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바는 새로워졌고 그의 인생은 다시 세워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바라바로 풀려난 자들이라면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희망과 기대가 있는 자여서 풀려났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바라바로 풀려났습니다.
나는 바라바로 풀려났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풀려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믿음을 적용하여 우리의 삶이 더 새로워지는 믿음의 길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바라바로 풀려났음을 다시 한 번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가 선해서 내가 잘해서 내게 뭔가 좋은 것이 있어서 풀려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풀려난 것을 더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 바라바에게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에게도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고 그 약속을 힘입어서 오늘 다시 세워지고 다시 회복되어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우주적 선물을 가장 먼저 받은 자가 의로운 자도 아니었고 세상에 유익을 주던 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여기며 살인한 자요 대적하는 자였던 바라바였음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듣습니다. 하나님, 바로 내가 그 바라바로 풀려났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바로 풀려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선물인데 그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제 새로운 사명과 새로운 비전을 기대하시고 명령으로 주시고 약속으로 주셨으니 그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오늘 우리의 삶이 그 주님의 선물로 인하여 그 생명으로 인하여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고 믿음으로 더 반응하며 믿음으로 더 적용하며 믿음으로 더 나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인생을 더 새롭게 세워주시고 나로 인하여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일터도 우리의 교회도 이 세상도 더 새롭게 세워지는 그 일에 우리를 바라바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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