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미가 6:1-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들한테 잘못한 게 뭐냐?”
곰곰이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소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놈들아! 내가 너희들한테 뭘 잘못했냐?”
“내가 너희들한테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속상하게 하냐?”
이런 말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서글픈 말입니까?
그런지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이렇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자식 때문에 너무 속상하고 서글퍼서 하는 말처럼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내가 너희들한테 뭘 잘못했기에 나한테 그럴 수 있냐?”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였고 내가 너희들을 인도하였고 너희와 동행했는데, 끝까지 너희들 편에 서 있었는데 도대체 왜 이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백성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우리도 할 만큼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 7절)
이렇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배하기 위해서 이 정도로 신경을 썼는데 우리가 잘못한 것이 뭡니까?”
잘 보십시오.
제물의 정도가 점점 더 강해집니다.
1년 된 송아지 한 마리에서 천천의 숫양, 그리고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그것도 안 되니까 맏아들!
그것도 안 되니까 나 자신!
제물의 규모와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들이 하나님께 점점더 정성을 들이는 많은 것들을 바치므로 예배의 정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점점 더 공허해졌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를 제물로 드리면서 예배 드렸다면 만족함이 있어야 되는데 그럼에도 더 공허했습니다.
‘내 예배가 부족했나?’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한 시간 기도했으면 마음이 충만해야 되는데 여전히 공허한 마음.
그래서 생각합니다.
‘두 시간 기도해야 하나?’
그래서 두 시간 기도하고 주일이면 하나님 앞에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고 열심히 사역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너무 공허합니다.
‘오늘 예배를 잘 못 드렸나?’
그래서 새벽예배도 나오고 수요 예배도 나오고 심야 기도도 나오고 헌금도 더 많이 하고 사역도 두 개 세 개 막 더 열심히 하고 그런데도 마음이 계속 공허합니다. 허전합니다. 충만하지 못합니다. 사역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합니다.
송아지 한 마리로는 안 되니까 양 천 마리, 그것도 안 되니까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그것도 안 되고 갈수록 더 공허해지니까 자기의 맏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좀 더 충만해질까 싶습니다. 그것도 이제 안 되니까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볼까 싶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데도 내 마음이 허전하니 어떻게 하지? 다 포기하고 버리고 목회자의 길을 갈까? 선교사의 길을 갈까? 그런 부르심의 길을 걸으면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정성의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인격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들을 존중해 주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을 인격으로 대하셨습니까?
인격으로 대하셨다는 것은 언약으로 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원망을 하든 불평을 하든,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든 하나님은 그들과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계속 건지시고 도우시고 채우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인자와 긍휼로 인내하시면서.
그래서 그들을 인도할 사람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발락과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그의 강력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담이 되어 주셔서 그 저주가 전혀 통하지 않게 하시면서 인도하셨습니다.
싯딤에서 길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이스라엘을 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하기는 잘했습니다.
심지어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드렸고 자기 몸까지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할 정도로 정말 잘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 그 마음을 몰랐습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기계적이었을 뿐입니다.
내가 천원 줬는데 별로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만 원 줍니다. 그런데도 내 말 안 들으니 10만 원 줍니다. 10만 원 줘도 내 말 안 들으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달라고 하면서 백만 원 줬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한테 백만 원이나 줬는데 왜 내 말 안 들어? 그럼 너한테 얼마를 더 줘야 되는 거야? 천만 원 주면 내 말 들을 거야?”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태도를 원하실까요?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 하나님 입장에서 1억이든 10억이든 100억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천의 수양이든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조금도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들이 말도 더럽게 듣지 않는 아들이 아버지께 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아끼는 구슬을 천 개 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빠 이거 다 가져.”
아빠에게 구슬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개의 구슬이든 만개의 구슬이든 아빠의 입장에서는 다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하나님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확하게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
딱 세 가지입니다.
1.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10절과 11절의 말씀을 통하여 한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10, 11절)
한 예를 들어주십니다.
불의한 재물은 정당하게 정상적으로 얻은 재물이 아닙니다.
다 부정으로 속여서 얻은 재물입니다.
축소시켜 가증한 에바 즉 저울을 속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1kg여야 되는데 저울을 조절해가지고 그보다 미치지 못해도 1kg이 되게 해놓은 것입니다. 수산시장이나 고깃집 가면 저울을 속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치 그와 똑같습니다.
그런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12절)1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했습니다. 또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고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었다고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것을 내가 빼앗을까?’
오로지 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16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조가 오므리 왕조입니다.
그게 아합입니다.
왜 그들이 가장 악한 왕조였습니까?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는 삶을 살았던 왕조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결정적인 왕조가 바로 오므리 왕조 아닙니까?
너희가 그런 삶을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이 세 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이 셋은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울을 속였습니다.
이웃을 강탈했습니다. 하나라도 더 빼앗을 수 있다면 이웃의 생명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버리고 그 마음에 우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는 어떻게 드렸습니까?
점점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삶은 그렇게 살면서.
미가서 1장에 나왔던 이야기가 다시 반복됩니다.
껍데기 신앙생활, 형식적인 신앙생활, 기계적인 신앙생활,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나님! 왜 우리를 심판합니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들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냐?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하냐?”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하나님을 이방신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이방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삶이 없습니다.
재물만 많이 갖다 바치면 됩니다.
일본의 어느 절에 대신 기도해주는 로봇이 있다고 합니다.
로봇에 내 이름이 적힌 기도문 하나를 만들어서 입력을 시켜 놓습니다.
로봇이 대신 기도해주는 것과 우리의 신앙이 뭐가 다릅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갖다 줄지라도 뭐가 다릅니까?
갓바위에 올라가면 한쪽에 초가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초마다 가격이 다릅니다.
기도 횟수에 따라 초의 가격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일주일에 한 번 기도해주면 만원, 일주일 내내 기도해주면 오만원 이런 식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려면 힘이 드니까 누가 내 대신 기도해줬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대신 기도해달라고 돈을 주는 것입니다.
“내 대신 기도해줘.”
“내 대신 잘 빌어줘.”
그렇게 돈 맡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이 책정된 만큼 기도해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마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입장에서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인격이 없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정말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내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거다.”
하나님 백성다운 삶, 성도 같은 삶은 교회생활만 열심히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교회 생활을 잘합니까?
교회 생활을 잘하는 목적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전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엉망인데 교회 와서 예배만 잘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미가 선지자는 그렇지 않음을 짚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그런 삶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이 예배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자.
즉 내 삶이 거룩한 삶이 될 때에 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 예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했던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입니다.
교회에서만 교인으로 살지 말고 삶 전체가 신앙이어야 된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 예수 안으로 더 들어가는 삶, 진리 안에 더 빠지는 삶을 경건 생활로만 이해한다면 너무 좁은 적용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교통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안에서 경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필수입니다. 그것 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좁은 영역에서의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확장 돼야 합니다.
그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 자신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이타적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어떻게 저울을 정직하게 달 수 있습니까?
이타적인 장사꾼은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이타적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울도 속여야 하고 품질도 속여야 그나마 조금 남는 것 아닙니까?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과 계속 교제해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신령한 교재를 통하여 계속 흘러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삶은 공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영역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로 시작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오늘 하나님과 다 교제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났다.’
끝이 아니라 이것을 시작으로 하루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과제들마다 끊임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거기서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뜻이 보이면 그 뜻을 순종할 수 있도록 계속 주의 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진정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제들마다 주님을 찾고, 주께 예배하는, 그 예배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회개 없는 예배, 삶이 없는 예물, 그런 공허한 종교 생활이 우리 안에서는 일체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기를,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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