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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오연택 목사 미가 강해

불순종의 재앙이 끝나는 그 날(미가 4:1-13)

불순종의 재앙이 끝나는 그 날 설교동영상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

미가 4:1-13

 

 

끝날에 이르러는”(1)

끝날이 나옵니다.

이 끝 날은 하나님의 모든 불순종이 끝나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던 삶이 끝나는 날!

그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끝 날은 마지막 종말의 날입니다.

1차적으로는 이 세상의 마지막 종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 날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끝납니다.

불순종의 모든 삶이 다 끝납니다.

더 이상 불순종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순종하던 자들은 다 무저갱으로, 다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순종의 삶을 통하여 얻어지는 삶들이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역사의 어느 한 날 분명히 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그날을 바라보며 그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중 언제, 어떤 시간에 찾아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1차적으로 우리의 육신이 끝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육신이 끝나기 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끝나는 날, 나의 모든 불순종이 끝나고 순종의 삶을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그 날 그 때 모든 것이 다 끝납니다.

이 땅에 살았던 불순종이 가져오는 모든 사망의 그림자와 같은 삶들은 끝나게 됩니다.

또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나뿐 아니라 모든 불순종이 끝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불순종이 다 끝납니다.

그래서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 땅에 있었던 모든 사망의 증상들, 불행들, 저주들, 아픔들, 고통이나 눈물이나 슬픔이나 다툼과 같은 것들이 이 땅에 더 이상 없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나의 불순종이 끝나는 날입니다.

또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이 세상의 불순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온전하게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미래의 시간인 그 날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 날을 우리의 삶 속으로 미리 가져와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 안에서 불순종의 삶을 끊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날입니다.

이런 끝 날이 내 인생 가운데 먼저 찾아와야 합니다.

불순종하는 삶을 끝내버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그 끝 날이 내 인생의 역사 안에서 먼저 찾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이 우리 안에 찾아와야 합니다.

카오스의 시간입니다.

믿음의 시간

내 인생 안에서 믿음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 불순종을 끝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환경을 고치고 우리의 상황을 고치고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친다고 하여 내 삶이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내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고, 이 환경이 나를 어렵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환경을 바꾸거나 이 상황을 떠나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본질적인 회복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찾아옵니까?

이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오는 일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 아닙니까?

전쟁이 그쳐서 칼을 쳐서 보습과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이 나라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는, 다시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그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다 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찾아옵니까?

나라와 나라가 모여서 의논한다고 됩니까?

우리 더 이상 싸우지 말자. 우리가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에너지와 자원과 시간을 함께 인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자.”
다 잘 살자는 말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칼 만들고 창 만드는 일에 애쓰지 말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에서 두려울 것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인류를 만들자.”
그런데 그렇게 의논하고 합의한다고 해서 그 일이 됩니까?

아닙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상황을 바꾼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처럼 내가 내 삶을 이렇게 저렇게 고친다고 하여 내 삶에 평안이 찾아오는 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떠나 다른 상황에 간다고 할지라도 그 곳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이 환경에서 떠나 다른 환경으로 이사를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도 또 전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안 만나고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며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도 전쟁이 있습니다.

삶 자체가 전쟁입니다.

그 전쟁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불순종입니다.
성경을 보면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에덴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어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사이로다.”

이렇게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순종할 때 이 모든 관계가 다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저 여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버렸습니다.

다 하나님 때문 아닙니까? 혼자 살아도 되는데 왜 저 여자를 주셔서 이런 문제를 만드십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탓합니다. 여자를 탓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끝납니다.

그 순간 모든 관계가 다 깨지면서 서로 전쟁합니다.

인류는 자연과 싸워야 했습니다.

자연이 순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사람과도 계속 싸워야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됐으니까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싸운다고 하여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
늘 하나님을 피하면서 숨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 깨집니다.

어디서부터 이 일이 왔습니까?
불순종에서 온 것입니다.

평화로웠던 우리의 모든 삶이 깨지고 서로 싸우고 물어뜯고 못 잡아먹어 하는 이 전쟁의 상황을 끝내기 원한다면 사람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끝 날입니다.

우리 인생 안에 먼저 믿음의 끝 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끝 날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의 끝 날이 우리 인생 안에 찾아오는데 그때 우리는 어떻 게 됩니까?

믿음의 끝 날이 없었으니 계속 불순종을 살아갑니다.

역사의 끝 날을 맞이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처리됩니까?

불순종한 자로 처리됩니다.

이처럼 역사의 끝 날이 찾아올 때 우리는 불순종으로 끝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시는 회복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금 여기에서 믿음 안에서 믿음의 끝 날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불순종을 끝내고 하나님의 통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끝 날이 우리 가운데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날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날!

즉 우리에게는 두 날이 찾아와야 합니다.

내 불순종이 끝나는 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을 시작하는 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믿음의 날

이 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날이 영적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무덤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났을 때 끝 날과 그날이 우리 인생의 역사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 영원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리의 시간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나의 모든 불순종은 십자가에서 끝났다!”

“2천 년 전 주님 죽으실 때 나의 불순종이 끝났고, 2천 년 전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하나님의 통치가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믿음으로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 속에 계속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했던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육신이 그런 습관에 길들여졌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으므로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타락 이후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불순종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불순종의 습관이 우리의 육신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을 입고 있습니다.

이 몸을 벗어버리면 좋겠으나 이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불순종의 습관을 쫓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죽이는 연습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바울은 처리되었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단 한 번 완전하게 처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더 이상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이미 다 끝났는데!

다메섹에서 완전히 처리되므로 옛 사람 사울은 끝나고 새 사람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계속 주장한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계속 십자가의 도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도 다 끝났다고 말씀합니다.

세상도 끝나고, 법도 끝나고, 나도 끝나고, 다 끝났다고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끝났음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또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는 영원의 믿음과 시간의 삶 이 두 개를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영원 안에서 다 끝났습니다.

영원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들입니다.

이미 모든 것들이 종결된 자들입니다.

이미 성취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살고 있으니까 영원의 믿음을 시간 안으로 가져와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불순종을 처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은 불순종에 길들여져 있고, 우리 안은 순종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계시니 이 둘이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절에 가서 땅 밟는 것이 영적 전쟁이 아니라 이런 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내 육신을 성령님께 계속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무엇입니까?

육신을 약하게 만들고 영이신 그리스도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그런데 자칫 육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경건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이 약해져야 합니다.

경건하면 경건할수록 우리의 육신은 더 약해집니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우리의 육신은 더 자신감을 잃고 우리의 영은 더 자신감이 생깁니다.

경건하면 경건할수록 우리의 육신은 계속 약해지고 우리의 영은 계속 강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항상 나옵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는 하십니다.”

그런데 경건을 오해하면 경건을 수행 혹은 수련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다른 종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경건의 특징은 수행입니다.

육신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인내를 더 강하게 수행하고 수련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우리의 경건을 마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하는 수행과 수련으로 오해한다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내 육신이 더 약해지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내 육신이 약해지므로 주님께 순종하기 더 쉬워지는 것이 경건입니다.

육신이 강해지면 불순종의 힘이 더 강해져서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의지적으로는 순종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육신이 하는 순종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계속 부릅니다.

은혜와 믿음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십니다.

내 육신을 내가 억지로 쳐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 영이 강하니까 자연스럽게 심지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순종하는 수준에 이르기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때문에 경건하면 경건할수록 즉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 안의 영은 더 강해지고 육신은 더 약해지므로 순종은 더 쉬워집니다. 그때 우리 안에 회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셔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내가 통치하고 내가 고치고 내가 노력한다고 하여 내 삶이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있느냐?’

얼마나 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순종을 위한 모든 경건입니다.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기도를 주셨습니까?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주님이 친히 기도하시는 모습은 딱 한 번 나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에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씀은 있는데 주님이 어떤 내용으로 무엇을 기도하셨는지를 모릅니다.

주님이 새벽에 기도하셨구나.’

해 뜨기 전에 기도하셨구나.’

이것을 우리가 알지만 뭘 기도하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기도한 기도의 내용을 밝혀주는 곳은 딱 한 번 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즉 기도의 목적은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깊은 기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문제와 짐들과 어려움들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너무 힘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어렵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사실 본질은 그것입니다.

하나님 이 질병을 좀 치워주세요. 내가 신경 쓰고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가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방해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출발입니다.

아프니까 하고 싶은 거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빨리 고쳐주세요.”
이게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초보일 때는 그렇게 시작하긴 합니다.

이를테면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거 못하니까 하나님께 돈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좀 더 나아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파서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고쳐주세요.”

하나님, 돈이 없으니까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좀 돈 좀 주세요.”

하나님, 가족들 때문에 염려하느라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더 깊어지면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과 상관없이 오로지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과정입니다.

내 기도가 어디로 간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지 않고 향방 없이 기도하면 기도의 진행이 늦습니다.

빨리 스텝을 밟으려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 순종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내 모든 삶의 고통과 불행은 불순종에서 찾아옵니다.

성경은 이것을 누누이 말씀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끝 날과 그 날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내 불순종이 끝나는 날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영역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끝 날과 그 날이 빨리 찾아옵니다.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불순종의 순간들이 많이 해결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대부분 많은 영역에서 잘 순종합니다.
불순종하는 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끝 날과 그 날은 빨리 찾아옵니다.

이것이 확장이 되면 우리의 가정이 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끝 날과 그 날이 속히 시작되게 해 주옵소서!”

가정 안에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들은 빨리 끝나는 날이 와야 되고, 우리의 가정 안에서 주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그 날이 빨리 와야 합니다.

그렇게 영역이 확장됩니다.

내 자신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세상에서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안에 많은 곳에서 불순종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하나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럴 때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의 영역이 하나씩 회복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삶이 회복됩니다.

가정 안에서 회복이 됩니다.

일터가 회복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내 심령이 회복됩니다.

내 심령이 제일 마지막입니다.

내 심령이 회복되면 다 끝납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가장 어려운 곳입니다.

제일 어려운 곳이고 제일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내 마음!

모든 불순종의 최종은 내 마음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통치의 결론도 내 마음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계속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회복됐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가 없다가 문제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요동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면 삶의 요동함과 상관없이 내 마음은 항상 평화입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모든 불순종을 끝내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더 강하게 세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인생에 믿음의 끝 날과 믿음의 그 날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더 순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을 꺾고 우리의 목을 쳐서 주님이 옳습니다.’ 성령 안에서 복종하는 날 되게 하셔서 우리의 삶이 더 회복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이 더 치유되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이 더 건강하게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