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미가 2:1-13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형식적 신앙이었고 기계적인 신앙이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여서 ‘저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배하는 것만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보면, 마치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 형식을 잘 갖추어 예배드린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속았습니다. 즉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형식보다는 예배자의 마음과 심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것임을 판단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진심으로 잘 믿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신앙으로 예배를 드린 결과에 대하여 본문 2장은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사람들을 자기 욕심을 위하여 포악하게 다루는데 그들의 생존 자체를 짓밟아버립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재산은 탈취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생명까지는 위협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일반적인 수준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아무리 욕심이 지나치고 경쟁이 치열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달려야 되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생존까지는 탈취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도 그 정도는 압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얼마나 욕심이 지나친지에 그 사람의 재산을 적당하게 탈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사람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그 재산을 탈취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내가 저 사람의 생명을 해한 적이 없어.”
겉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 그런 적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사람의 욕망 때문에 그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어 생명을 잃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빼앗아가니까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처럼 인간에 대하여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못 드리게 되면 우리 안에 끝없는 욕망만 남습니다.
아무리 빠지지 않고 예배를 잘 드렸다고 할지라도, 예배 안에서 감동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은혜와 예배의 감동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구분해야 합니다.
감동 받은 것을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배드리면서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감동 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터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혼이 터치를 받아서 감동이 있어도 은혜 받은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나는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
‘오늘 예배를 잘 드렸다.’
이 느낌만 가지고는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잘 드렸는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린 후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면 예배를 잘 드렸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점검이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린 사람은 상식선에서 사람을 대합니다.
아무리 욕망이 있고 화가 나고 그래서 억울함과 분함이 있을지라도 예배를 잘 드렸다면 그것이 깨끗하게 치유되지는 못할지라도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상식의 선이 있게 됩니다. 즉 상식의 선이죠.
그런데 이 상식의 선을 넘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예배를 잘못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죽었던 우리가 예배 가운데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공급받아 내 심령이 더 살아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살아있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람들을 난폭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인자와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예배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와 긍휼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예배 안에서 나를 긍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격이 하나도 없는 나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로 받아주십니까?
“나는 네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지만 네가 왔으니까 불쌍해서 너를 만나기는 하겠다.”
이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 정도 수준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배 안에서 그 하나님의 긍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감동을 경험하는 것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정도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시고,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그 긍휼을 예배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자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나. 이 때 ‘가난하다’는 것은 의에 대한 가난함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포함한 가난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나, 하나님 앞에 범죄한 나, 악으로 충만한 나, 이 모두가 가난함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한 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그런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예배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 마치 노예가 주인 앞에 엎드리듯 그렇게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예배의 태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예배의 자리를 떠나서 긍휼을 베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따라서 1달란트는 노동자가 16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한 임금과 같습니다.
1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당시 노예 1명의 최고가가 2000데나리온이라고 하니 그것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노예 3만 명의 값이 됩니다.
당시 로마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거둔 세금 총액이 8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즉 1만 달란트는 그 세금의 10배도 넘는 금액입니다.
1만 달란트에 비하면 100데나리온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빨리 갚으라고 합니다.
심지어 이 사람이 안 갚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정말 갚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을 대합니까?
“못 믿겠으니까 너 감옥에나 들어가라!”
우리의 완악함이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는데 그 용서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규모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예배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내가 받은 것이 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과 구속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부모에게서 받은 은혜가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큰지 모르니까 부모님께 효도를 하되 형식적으로 자식의 도리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조금의 긍휼도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과입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예배를 잘못 드렸을 때의 결과는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6절)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예언을 합니다.
“당신들 계속 이렇게 죄를 지으면 심판 당합니다. 속히 죄에서 돌이키십시오.”
“당신들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이렇게 경고하는데 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말만 하라고 합니다.
어떠한 좋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절)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예언하면’
“잘 살 거야.”
“부자 될 거야.”
“성공할 거야.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열심히 너의 소원을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자격이 없을지라도 선지자로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그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사망에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죄를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행하셔서 당신들이 그 죄를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당신들을 멸망하게 할 것이다.”
백성들의 죄를 보고 선지자가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데 듣기 싫은 것입니다.
왜 우리한테 욕을 하냐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우리를 축복해야 되고 우리를 위로해야 되고 우리를 격려해야 되고 우리에게 힘을 줘야 되고 우리에게 소망을 줘서 우리가 절망하고 낙망하지 않고 기운 차려서 살도록 해야지 왜 우리에게 멸망한다고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겁 주냐고,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를 잘못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꽂히지 않습니다.
다 듣기 싫습니다.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설교자일 수도 있고 식구들일 수도 있고 친구들일 수도 있고 이웃들일 수도 있습니다.
못 들으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계속 듣게 하십니다.
그런데 듣기 싫은 것입니다.
나한테 좋은 말 해주는 사람만 좋습니다.
나한테 듣기 좋은 소리 해주는 사람들의 말만 들립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는데 무조건 나에게 잘 될 거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른 말입니까?
내가 분명히 죄 가운데 있는데 나보고 잘 될 거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리 본인이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예배가 실패한 결론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 말씀이 내 심령을 쳐서 내 심령의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그 죄악 된 마음들을 꺾어 주 앞에 굴복하게 하심으로 다시 돌이켜 말씀을 향한 회개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예배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생명이고 그 말씀이 빛이고 그 말씀이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이르는 이 말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살게 하고 구속하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놔두면 방자하게 행하니까 규칙을 만들어서 옭아매려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시려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에덴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곳이 에덴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까 쫓겨난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 다시 에덴이 회복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에덴이라는 단어가 곧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너무 불행해. 내 소원은 행복해지는 거야. 행복해지고 싶어.”
이 말을 구약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나는 에덴에 살고 싶어. 에덴에서 쫓겨나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어. 행복했던 에덴에서 다시 살고 싶어.”
이 말입니다.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어. 불순종하여 내 인생에 불행이 닥쳤고 내 인생이 어두워졌어. 내 인생에 사망이 깃들고 내 인생이 두렵게 되었어. 나는 이것들이 없는 불순종의 삶을 떠나 순종의 삶을 살고 싶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내 인생을 비추시므로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돌이킬 것이 무엇일까?’
‘주 앞에 회개할 것이 무엇일까?’
‘내가 떠나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내가 어디를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가?’
이것들을 발견하는 게 말씀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한 주간 나의 삶이 말씀으로 비추어주실 때 회개할 것, 버릴 것, 떠날 것, 돌이킬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여전히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예배를 잘못 드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안 들리는 것입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귀가 큽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잘 듣는 것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
“너희는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내 말을 경청할지어다.”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많습니다.
기독교신앙의 특징은 이처럼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신앙의 특징은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신앙의 특징은 입이 큽니다.
이방신앙은 내가 말할 테니 신에게 잘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듣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잘 듣는 자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할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선택하여 듣습니다.
마치 텔레비전채널을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습관입니다.
그런데 그 습관을 똑같이 예배까지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내 채널에 맞춥니다.
‘오늘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네.’
‘오늘은 재미있는 말을 하네.’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내 귀를 열고 사무엘처럼 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렇게 예배를 잘 드린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삶을 살아가서 우리에게 들리는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항상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하여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하여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배를 잘 드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을 긍휼로 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더 살아나게 하고 더 회복되게 하고 더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고 더 일어서게 하고 더 온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부족하고 흠이 있습니다. 모두 문제를 지닌 자들 아닙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흠이 있으니까 우리를 더 짓밟아서 못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흠이 있고 문제가 있어도 더 일어설 수 있도록, 더 회복될 수 있도록, 더 잘살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세워주고 긍휼로 대해줘야 합니다.
무엇이 긍휼입니까? 내 것을 주는 것 아닙니까?
내가 주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기회도 주고, 물질도 주고 선물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잘 드린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회개하고 다시 예배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예배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예배자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고 뭔가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인격으로 대하는 예배자가 되도록 해 주옵소서.”
이렇게 다시 예배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들려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랜 과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그 일이 아니라 오늘 내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읽혀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야 합니다.
말씀 가운데 내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내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 자들이 남아있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할 때 그 가운데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국민이 모두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모두 다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에 서있는 자들이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들만 골라서 풀무불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집어넣습니다. 용광로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 다 집어넣습니다. 그 용광로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어떻게 나와 똑같이 취급합니까? 어떻게 똑같이 하나님이 나를 대우합니까?”
이런 자들이 남아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처럼 고백하는 자들이 남겨진 자들입니다.
“우리 조상의 죄가 모두 내 죄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죄로 가지고 옵니다.
그러니까 성문이 훼파된 것을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난 몰라. 내가 잘못했나? 조상들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지. 나는 하나님 잘 믿어서 출세해서 잘 살고 있어. 나는 복 받은 사람이야. 그것 봐! 하나님 똑바로 못 믿으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죄로 여기고 함께 고난당했습니다.
그게 남은 자입니다.
함께 그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것을 내 문제로 가져오는 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헌신해야 되는지 묻는 자.
그는 자기의 인생을 헌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지적하는 자가 남은 자가 아닙니다.
“그것봐 그런 식으로 믿으니까 이런 꼴 당하지.”
이렇게 비난하고 탓하는 사람이 남은 자가 아닙니다.
설령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의 죄로 여기고 내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정결해지기 위하여 살아가는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어디로 데리고 오십니까?
“보스라의 양떼 같이”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보스라로 다시 데리고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12절)
이제는 크게 기뻐하며 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절망이니까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할 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안에 예배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 회복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찾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더 예배의 심령이 뜨거워짐으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 앞에 끝까지 남아있는 예배자로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온 심령을 다 주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주의 긍휼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예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귀를 열고 듣는 예배자가 되게 하셔서, 우리 또한 받은 긍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우리 곁에 있는 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게 하시고 항상 모든 것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에 경청하여 귀를 기울이는 심령으로 사는 예배자 끝까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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