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가 3:1-12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그들의 악행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정치지도자들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들은 오히려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했습니다. 이 때 악을 기뻐한다는 말씀에서 ‘기뻐한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좋아한다, 즐거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악을 사랑한다.’
즉 악을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면서 이에 대하여 일말의 갈등도 없이 아니 오히려 이런 고민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악을 더 행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악을 더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악의 사랑을 더 받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상태가 곧 ‘악을 기뻐한다’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입니다.
얼마나 악을 행하였으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서 냄비에 넣어 삶아 먹는다는 표현을 했겠습니까?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2, 3절)
이것이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삶은 달랐을까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축복해 줍니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 할 거야.”
“하나님이 네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실 거야.”
“너는 크게 성공할 거야.”
“네 자식, 그 자식의 자식도 이 땅에서 잘 살 거야.”
이렇게 있는 복 없는 복 모두 빌어줬습니다.
그런데 돈을 안 가지고 오면 그 때는 저주를 했습니다.
“3대가 망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5절)
이처럼 돈을 가지고 오면 평강을 외치고 자기 입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해주십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11절)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결코 우리는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졌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성전이 버젓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항상 그 성전에 계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항상 거기에 있고 그 곳에 항상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성전을 떠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첫 번째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시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인지, 하나님이 떠나셔서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가 되었는지 무엇이 먼저인지 그 순서를 칼로 베듯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을 것이고,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으니까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를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문에 계속 껍데기밖에 없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니까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삶이긴 했습니다.
정치지도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으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성공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백성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축복하고 안 가지고 오면 저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도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면서도 보이는 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재앙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12절)
시온을 갈아엎은 밭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온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한 시온을 하나님께서 갈아엎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산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전을 떠나셨지만 아직 그 성전이 눈에 보이게 남아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미가 선지자의 예고를 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성 모독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신성모독입니까?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미가가 신성 모독입니까 아니면 성전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 당시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들의 삶이 신성 모독입니까?
무엇이 신성 모독입니까?
미가 선지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신성 모독이 어디 있어?”
“감히 성전이 무너진다고?”
“감히 성전이 폐허가 된다고?”
“이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미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야!”
“하나님을 떠난 자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그런 삶을 살던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들을 오히려 성전을 지키는 자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도 삶은 그렇게 살면서도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신앙입니까?
그런 가운데 미가가 자기는 어떤 삶을 살겠다고 고백합니까?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8절)
계속 죄를 고발하는 그 사역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미가에게 주어진 사역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누가 좋아한다고 이런 사역을 감당하겠다고 합니까?
죄를 고발하는 악역을 감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가 자체도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미가 선지자를 향하여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너는 성공하지 못한 선지자라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실패한 선지자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자기 열등감에 빠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도 나는 성령이 충만해져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끝까지 감당하려면 첫 번째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미가는 ‘성령 충만해질 것이다’라는 미래형 단어를 쓰고 있지 않고 ‘지금 성령 충만해졌다’라는 현재형 단어를 사용합니다.
나는 지금 성령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오직 나는 성령이 충만하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아무리 미가가 자기 의지가 강하고 자기 뜻이 분명했을지라도 그 일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이깁니까?
온통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을 이깁니까?
백성들은 그렇게 당하면서도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꼼짝 못했습니다.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백성들도 다 속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니까 저런 자리에 올라갔겠지.’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저런 자리에 올라갔겠지.’
모두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 가죽과 살을 모두 뜯어먹는 것은 생각도 않고 그냥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가 부르셔서 미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고발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그 사명을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늘,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우리 눈에 보이든, 내 삶에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믿을 때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 안에 먼저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계속 충만해집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이시며 말씀이십니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하여 영이 충만해집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기도함으로 그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책으로 읽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질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지식으로 읽는 수준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배부를 수준까지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오늘 생명 양식을 먹었다.
말씀의 빵을 내가 맛있게 먹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더 강력해집니다.
성령충만하기를 사모하십니까?
물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성령이 생각나게 하리라.”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마다 우리 안에서 우리가 먹었던 말씀을 깨달아지게 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영이 강해지길 소망합니까?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아지고, 깨달은 말씀을 내가 먹을 때 영이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내가 그 말씀을 온전히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을 믿음
말씀을 먹고 그 말씀에 순종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영은 강력해집니다.
미가는 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하다”라는 말은 나는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모든 계시의 말씀들을 깨닫고, 지금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고 말씀을 깨닫고 순종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열심으로는 이 사명을 결코 끝까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도록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세상과 겨루어서 이기려면 그 세상으로부터 나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나오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됩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더 구합니다.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해지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입니다.
능력, 육체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정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용기, 정신적인 능력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육체가 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가 강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신력, 의지가 강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충만해져서 끝까지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그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미가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정치 지도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1절)
이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명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명과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의를 안다’는 것은 ‘이것이 정의야’라는 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정의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희의 본분, 너희의 사명이 아니냐?”
그런데 그들은 사명과는 정반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4절)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려서 안 보겠다는 뜻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너희를 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끝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네가 미워! 그러니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도록 하자!”
하나님이 이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입니다.
인생 끝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자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종교지도자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6절)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인생이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보지 못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니 그것이 가장 큰 재앙 아닙니까?
말씀을 봐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캄캄합니다.
세상을 봐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그만큼 그들의 인생은 밤과 어둠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7절)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행세하고 다녔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인생은 캄캄한 밤이고 어둠인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침묵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을 살지 못하는 것이 곧 재앙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재앙이 무엇입니까?
사명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사역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재앙입니다.
직분은 있고 사역은 없는 교회
이것이 재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게 주신 사명 그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역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원래 직분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출발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이것저것 다 하다 보니 이런 저런 원망이 들려옵니다. 헬라파 과부와 유대파 과부들 사이에서 헬라파 과부들에게 늘 구제가 빠지다 보니 불만이 생겼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사도들의 눈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래가지고는 큰일 나겠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이 일을 전담할 수 있는 주권자들을 세우기로 합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로 일곱 집사입니다. 교회가 건강해지고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직분입니다.
이 직분 덕분에 교회가 굉장히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뭐든지 세월이 지나면 다 본래의 의도가 퇴색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사역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이 재앙입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충성되게 사역할 수 있는 그 사명이 우리한테 꺼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내가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이다.’
이래야 마땅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교회 일을 해야 돼?’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사역해야 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명이 복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일을 주지 않으시고 끊어버리십니다.
사명을 어둡게 하십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이 내게 살아야 할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사명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미가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몸도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영도 강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기쁘게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사명이 끝나면 멋있게 가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명이 없는 장수는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사명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끝까지 사명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끝까지 사역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는 사역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의 신부로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 그분 앞에 잘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미가 선지자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미가 선지자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고 미가 선지자의 사모함이 나의 사모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신도 강건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은 더 강력해져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일 하다가 주께로 가는 인생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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