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미가 1:1-16
미가 선지자는 11대 요담부터 13대 히스기아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타락해 가는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의 신앙의 형태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그럴 듯하게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수차례 경고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기들의 삶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즉 삶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신앙의 문제라고 보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가 계속 공격하고 위협하므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결국 북이스라엘도 망하고 남유다도 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앗수르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국력이 약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형식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배웠던 레위기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사의 모양이나 내용들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즉 처음. 배운 대로 똑같이 제사했습니다.
문제는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모습처럼 그들의 마음도 전심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는 모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마음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역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알려진 찬양, 많이 불려지는 행복, 충만, 감사 등을 작곡한 작곡가는 이렇게 작곡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기도하다가 어느 말씀이 감동이 되면 그 말씀의 주제를 가지고 곡을 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감동이 되면 감사에 관한 가사들을 쓴다고 합니다.
한두 달 써서 곡을 붙여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면서 1년 2년 씁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안에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질병의 사건, 자녀의 사건, 부모의 사건, 경제적인 사건, 사람과의 사건들을 통하여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고 한편으로는 원망과 불평도 나옵니다. 그렇게 스스로 처량해 보이기도 하는 감정들을 계속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발표를 앞둔 찬양의 가사를 봅니다.
‘감사’의 가사를 적고 또 곡을 붙여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그 가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더랍니다.
그 때 회개하고 깨닫습니다.
그제야 그 곡이 자신의 진심이 됩니다.
그래서 이분은 한 곡을 작사 작곡하여 내놓을 때마다 이런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어야 된다.’
그렇게 살고 있을 때 그 곡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가사를 써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적었던 가사, ‘행복’이라는 찬양의 가사 ‘감사’라는 찬양의 가사, ‘충만’이라는 찬양의 가사를 머리로 아름답게 멋지게 써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 곡처럼 살고 있는가?’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찬양할 때 정말 아름답고 영성 깊은 믿음의 가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이 노래로 부르는 사람이 있고 자기의 고백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고 자기의 삶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할 때 음악적으로 아름다운 찬송을 얼마든지 부를 수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아름다운 찬송을 부를 때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영성 깊은 찬양이 아닐지라도 음악적으로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어도 듣는 사람이 얼마든지 감동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찬송을 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감동을 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가 감동했다.”
우리는 그럴 때 은혜라고 자꾸 갖다 붙입니다.
아닙니다.
은혜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찬양이 우리의 진심이고 고백이고 삶이 될 때 은혜가 됩니다.
어떻게 노래 한 곡이 내 안에 있는 영을 깨우고, 그것을 나의 삶으로 가져와서 내 삶을 비추어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고, 그래서 오늘 내 삶의 실제가 될 수 있습니까? 그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때 비로소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래가 좋아서 눈물이 난다.’
‘노래가 좋아서 가슴이 편안해졌다.’
물론 그것이 은혜의 시작이고 은혜의 출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은혜가 되려면 우리의 고백과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이 내가 찬송을 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든가, 내가 감동을 받으면 우리는 스스로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미가시대에 그런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생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 믿음의 역사 안에서 그런 일들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잘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기를 통하여 가르쳐주시고 예배, 모세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예배의 모양과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시킨 대로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그 예배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찬송을 부르되 그 찬송의 가사와 우리의 마음이 거리가 먼 것처럼!
그 찬송의 고백과 우리의 삶이 거리가 먼 것처럼!
“예수님을 더 원합니다” 찬송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소원은 예수님을 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내가 다른 것을 더 많이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처럼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거리가 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예배 형식대로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고 하는 기계적인 신앙!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교회에 와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새벽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굉장한 믿음의 결단이고 어려운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그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해야 되는데 마음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라가려고 애를 쓰지만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아예 따라갈 마음이 없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따라갈 마음이 없는 것을 예를 들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교회에 와서 새벽예배드렸다는 경건의 이력을 하나 더 붙이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을지라도 ‘내가 새벽예배 드렸으니까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실 것이다’ 믿는 것이 기계적 영성입니다.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거기서 커피가 나오지 않습니까?
돈을 넣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든 정직한 사람이든 열심히 사는 사람이든 자판기는 구분하지 않습니다.
돈만 넣으면 나옵니다.
그게 기계 아닙니까?
기계는 돈만 넣으면 원하는 것이 나옵니다.
돈 넣고 버튼 누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런 기계적 신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가 시대의 신앙이 마치 이처럼 기계적 신앙이었습니다.
기계는 인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계를 존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계로 다루는 기계적 신앙은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마치 은행의 현금자동인출기로 취급할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마치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자판기에 돈 넣어서 버튼 누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랬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가서는 그런 신앙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데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느냐?
미가서의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1장부터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인격으로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쟤는 내가 하라고 하면 다 해. 저 아이는 그냥 호구야.”
이렇다면 인격으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쟤는 나랑 얼마나 친한지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해.”
과연 그런 관계를 친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호구로 삼는 관계입니다.
인격으로 만난다는 것은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그를 생명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를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으로 만나는 관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격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왜곡하여 적용할 때가 종종 많습니다.
은혜 체험한 것을, 성령 체험한 것을 인격으로 만났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아닙니다.
인격으로 만난다는 것은 인격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인격으로 대해주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사람과 만나면서 늘 감정이 좋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 만나면 항상 기분 좋고, 항상 즐겁고, 항상 사랑스럽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나다 보면 때로는 감정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이 상한다고 해서 잘 대해주다가 못 대해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이 인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서로 사랑하지만 늘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감정이 상했습니다.
감정이 상했다고 하여 갑자기 욕하고 집어던지고 때린다면 인격적인 관계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감정이 상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마땅한 상식적인 관계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감정이 상하여 이 사람이 싫어도 존중해줘야지.’
그것은 상식으로 지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감정은 상해서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감정대로 대한다면 인격이 아니지. 내가 이 사람을 존중해줘야지.’
누구든 그렇습니다. 스승이든 부모든 선배든 목사든 그 사람의 자리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입니다.
때로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감정이 상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관계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동안 감정이 상해도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사연들이 다 있겠지.’
‘오죽했으면 저렇게 행동하겠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가 안 됩니다.
감정이 상했을 때에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어떻게 감정을 잘 추슬렀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되면 어떻습니까?
‘상식적으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정의 사연이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그건 아니지.’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지로 존중해야 합니다.
감정도 누르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다 누르고 그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렇게 해야된다고 하는 의지, 그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게 늘 좋습니까?
예배드리면 늘 기쁘고 예배드리면 항상 은혜 받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지식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고 기다리신다는 지식, 우리의 예배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놓으신 그분에게 내가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지 하는 지식, 그래서 예배드리고 싶지 않은 감정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가 말씀의 지식 깨달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감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이럴 때에도 의지를 다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의지로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한 지체로 최선을 다하는데 다른 지체는 전혀 그렇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나만 혼자 열심히 그리스도인의 몸의 지체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은 전혀 관심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몸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데 미가 시대 때에는 이게 없었습니다.
인격이 없이 껍데기 모양만 잘 갖추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예배했으니까 하나님 빨리 주십시오.”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었는데 나오지 않으니까 발로 차는 것과 같습니다.
막 두드립니다.
“고장 아니야? 내가 하나님 예배했고 헌신하고 헌금했는데 왜 안 줘!”
성질내면서 마치 자판기를 대하듯 하나님께 성질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도저히 인내하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 참 문제가 있어. 어떻게 하나님의 그런 식으로 믿어?’
우리의 신앙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전혀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 없이 기계적으로 찬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계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온갖 좋은 말들만 다 갖다 써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계적으로 헌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얼마든지 기계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오래 하다 보면 기계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 기계적으로 섬기고 헌신하는 것은 아닐까?
목사도 얼마든지 기계적으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기계가 설교를 더 잘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는 엄청 더 잘할 겁니다.
어쩌면 사람들도 다 기계한테 갈지도 모릅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하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계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자기 안의 영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없습니다.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기계보다 훨씬 떨어지고 때로는 오류도 있겠지만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설교자,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설교자는 그 생명을 회중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i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와 가짜가 정확하게 구분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만 살아남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예배자리에 우리의 모양 ai 갖다 놓으면 됩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예배 잘 드릴 것입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찬송도 잘할 것입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사역도 잘할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정확하게 갈려집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시대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세상에 와서
진짜와 가짜가 구분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다 속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도 나한테 속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벼랑 끝을 향해서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모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저보다 설교 잘하는 ai가 옆에 와 있으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누구도 ai와는 지식으로는 경쟁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지식으로 경쟁합니까?
ai에 없는 생명이 내게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모든 가식을 다 버리고 그 생명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와 경쟁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거 아니에요.
“직접 예배당에 오지 마십시오. ai 보내십시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어요?
“번거롭게 뭐 오십니까? ai 보내시면 됩니다.”
ai박장로님 ai집사님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뭐가 다른가?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이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마음을 담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나’라는 ai가 지금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과 진배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는 예배를 잘 드렸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선 안 됩니다.
내 찬송이 내 진심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내가 부르던 찬송처럼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는 못하겠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애통해하며 주 앞에 탄식하고 주의 은혜가 더 부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 내 삶이 살아있으려면 그렇게 돼야 합니다.
한순간의 기도와 한순간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이 담겨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한 순간이라도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우리의 마음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주께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진심이 되게 하옵소서. 화려하고 멋있는 신앙의 껍데기에 속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속히 버리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진실된 경건의 옷을 입는 신앙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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