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형통이면 하나님께서 상 받는 인생입니까?
실패하고 어려우면 하나님께 벌 받는 인생입니까?
반드시 바뀌어야 할 시선입니다.
엘리바스도 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리 하나님과 화목하여 네가 당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
엘리바스도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욥이 고난을 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때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서 하나님과 변론할지라도 하나님께 책망 받을 만한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고하지 않은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이것이 바로 엘리바스의 시선입니다. 우리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시선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재난이나 아픔이 당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부터 찾습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죄를 회개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죄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믿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스스로 찾는 죄는 대부분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끝난 율법적인 죄입니다.
엘리바스의 시선으로 내 삶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안에서 우리 또한 욥처럼 십자가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든지 죄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죄의 모든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형벌을 다 담당하셨으므로 우리에게는 남은 형벌조차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시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욥의 고백처럼 불편함이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한 나인데 왜 지금 이런 고난을 당할까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욥은 믿음의 시선으로 고백합니다.
“나를 순금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봅니까?
‘지금 내 삶은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해서, 죄를 지어서 당하는 벌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습니까?
거듭났다는 말은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거듭났다면 하나님은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물론 징계는 하십니다.
징계와 벌은 다릅니다.
벌은 그냥 혼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형벌을 가하는 게 벌입니다.
그러나 징계는 다릅니다. 징계는 그 사람을 더 좋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징계는 다른 의미로 연단이 됩니다.
풀무불에 들어간 쇠가 녹아 없어졌다면 그것은 벌입니다.
그러나 풀무에 들어가서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금이 나오면 그것은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불에 그 금이 다 녹아 없어지면 벌을 받는 것이지만 모든 불순물들만 타고 없어지고 깨끗한 순금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징계인 것입니다.
벌과 징계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다 징계입니다. 연단이란 뜻입니다. 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고난의 연단을 반응하고 고백하면 점점 더 순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풀무불에서 나옵니다.
육신이 죽으면 고난의 불도 꺼지고 우리는 그 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더 이상 고난의 불속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곧 죽음의 시간입니다.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풀무를 통과한 사람마다 순도가 다릅니다. 18K 24K 어떤 사람은 10K정도 밖에 되지 않고. 무슨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고난의 불 가운데에서 얼마나 순종했는가, 나의 불순물들을 모두 내어놓고 다 타도록 믿음으로 복종하였는가 정도에 따라 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참 아까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에 내가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참 좋아하고, 필요하고, 그것만 있으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굉장히 유익한 것들인데 그것이 영성에 해로운 것이란 뜻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이게 나한테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정금으로 만들어가는 일에는 해로운 것임을 진리 안에서 볼 수 있어야 되고 그렇게 보이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당장 유익하니까 못 버립니다. 만약에 나한테 해롭고 무익하고 오히려 내 인생을 더 안 좋게 만드는 것임이 선명하게 보인다면 못 버리겠습니까? 얼마든지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유익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연합, 닮아감, 정금으로 순도가 높아져 가는) 일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과감하게 배설물로 여겼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계속 욥에게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죄를 짓고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렇게 고집 피우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욥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 안에서 욥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 뒤에서 뒷담화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진리가 약해서 그런지 진리가 없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남의 삶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판단합니다. 그런 말에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물론 괴롭습니다. 섭섭하고 화도 납니다.
욥도 괴로워하고 상처도 받았습니다.
도량이 깊은 신선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안 들으면 좋은데 들리면 괴롭고 마음도 상합니다.
그럴지라도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도 좀 상하고 기분도 나쁘고 또 사람 괘씸하겠지만 다시 진리로 돌아와서 진리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내가 받을 형벌 다 받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다 끝났습니다. 내가 무슨 받을 벌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고난은 내 죄로 인하여 받는 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불순물들, 내 육신에 내 옛 사람이 여전히 놓지 않고 가지고 있는 오랫동안 내 육신으로 살았던 내 삶 가운데 깊이 물든 여러 가지 불순물들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죄악 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또 오늘 우리가 게다가 육신을 입고 있으니 그 원래 육신에 입혀진 모든 불순물들과 내가 또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 세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세상에서 묻었던 물들었던 그 모든 불순물들 이것들을 내가 모를 때는 그냥 그것이 그냥 당연한 듯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이렇게 살았으나 성령이 우리한테 딱 들어오면 계속 책망하시잖아요.
힘드니까 안 버리고 계속 붙잡고 있으면 순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벌이 아니라 나의 인생 안에 들어 있는 불순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내가 그 연단의 불 안으로 지금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얼마나 뜨겁고 괴롭고 아픕니까?
말할 수 없이 힘듭니다.
인생의 고난을 불은 한증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겁습니다. 그래서 빨리 나가고 싶은 건 맞아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뛰쳐나가면 순도는 떨어지는 것입니다.
결정하십시오.
빨리 나갈 것인가 아니면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 견딜 것인가?
그래서 믿음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그래서 인내하면서 계속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의 불순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만 고난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없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의 고난과 믿지 않는 자의 고난의 결과가 다릅니다.
세월의 고난도 우리를 부서뜨립니다.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좀 달라졌어.’
그런데 나이가 들어 힘이 빠져서 약해져서 달라진 것인지 고난의 불속에 들어가서 모든 불순물들이 제거되어 순도가 높아져서 달라진 것인지 다릅니다.
젊고 힘이 있었을 때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싸우고 못된 소리하다가 나이가 드니까 옛날처럼 안 한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변한 게 세월이 흘러서 힘이 빠져서 그렇게 변한 건 아닙니까?
욥은 고난이 벌이 아니고 연단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순도가 높은 순금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했지만 욥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이 너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렇구나.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순금이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더라도 삶의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두려운 거구나. 걱정도 되고 겁도 나고 근심도 하고 슬프고 탄식도 나오는 거구나. 이게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구나.’
고난 앞에서 탄식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이, 우리의 마음이 교과서처럼 됩니까?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좀 복잡합니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생각이 마음을 바꿔주지 못합니다.
생각은 되지만 마음이 안 따라오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도 그랬습니다.
고난이 순금으로 나오는 연단인 줄 알지만 마음은 생각을 못 따라가니까 힘들고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믿음이 없다고 보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있지만 얼마든지 두렵고 불안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탄식은 하지만 절망은 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탄식하고 두렵고 또 걱정도 많고 또 슬픔도 나고 눈물도 나지만 그 가운데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나를 끌고 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여기서 탈출하지 않겠다. 도망가지 않겠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견뎌서 99.9% 순금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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